비명 같은 외침과 동시에 열린 509호 베란다 창문 사이로 무언가가 튀어나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어두운 밤이라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날아가는 속도와 얼핏 본 형태로 봐서는 성인 남자 구두 한 짝 같습니다. 포물선을 그리다 주차장 바닥으로 떨어진 구두 한 짝은 바닥에 떨어지고 몇 바퀴를 구르더니 303호 승합차 앞에서 멈췄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얼마 전에 당한 가지치기 때문에 509호를 제대로 들여다볼 수 없었다는 겁니다.
509호는 부부와 아이 한 명이 살고 있는 집이라 처음엔 그냥 흔한 부부싸움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509호 남자가 커다란 여행 가방을 끌며 아파트 현관 앞에 조심스럽게 나타났습니다. 남자는 여행 가방을 잠시 현관에 세워 두고, 주차장 쪽으로 절뚝거리며 걸어갔습니다. 베란다 창문 밖으로 던져진 구두를 찾고 있는 모양입니다. 나는 당장이라도 303호 승합차 옆에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느릿한 남자의 행동을 답답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남자의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울리자 남자는 번개처럼 전화를 받았습니다.
“어, 세미야! 이제 출발하려고. 응, 그래. 바로 갈게.”
남자는 전화를 끊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습니다. 그리고는 좀 전과 다르게 서둘러 구두를 찾았습니다. 303호 승합차 앞에서 구두를 겨우 찾아낸 남자는 여행 가방을 차에 싣더니, 바로 시동을 겁니다. 남자가 차를 몰고 아파트 단지를 완전히 빠져나갔을 무렵, 어디선가 베란다 창문이 거칠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 소리는 분명 509호 베란다에서 나는 소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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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9호 남자는 그렇게 집을 나간 뒤,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509호 여자가 생전 입지 않았던 정장을 입고 오랜만에 외출을 했습니다. 화장과 의상이 화려했지만, 여자의 표정은 잿빛처럼 어두웠습니다. 장례식장에 가는 조문객처럼 말입니다. 화려하지만 어두운 외출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509호 여자는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합니다. 509호 여자의 화사한 화장은 거의 다 무너져 있었고, 표정 또한 이미 영혼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집으로 들어간 뒤, 나는 온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야 새로 자라난 이파리로 509호 안방을 들여다볼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509호 여자는 안방에 놓여 있는 커다란 화장대 앞에 홀로 앉아 있었습니다. 처음엔 화장을 지우려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여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거울 앞에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생각에 잠겨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고 꽤 오랜 시간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509호 여자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웃음인지 울음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소리를 냈던 것 같습니다. 여자의 눈가에 검은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면, 나는 끝까지 그녀가 웃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509호 여자는 우는 듯 웃으며 어둠이 세상을 완전히 지배할 때까지 화장대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어쩌면 509호 여자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지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2006년 4월 웃다가 울었고 울다가 웃었다 ] **
한달 만에 남편을 만나 정식으로 이혼이라는 것을 하러 가는 길이었다. 남편은 나를 보자마자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전화기만 자꾸 만지작거렸다. 그런 남편을 보고 있자니, 어렵게 가라앉혔던 분노가 다시 솟구쳤다. 지난 몇 달 동안 내게 막무가내로 이혼을 요구했던 남편이었다. 내가 이혼은 절대 못해주겠다고 버티자, 남편은 나를 미친 여자 취급까지 했었다. 결국, 나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내가 이혼하겠다고 말하자, 남편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남편은 그런 행동이 내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남편의 얼굴이 조금 이상했다. 누구보다 행복해야 할 사람의 얼굴이 무언가 초조하고 불안해 보였기 때문이다. 왜 그러는지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이제 우리 두 사람은 그런 질문을 할 만한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저기 앞에 까마득하게 쌓여 있는 법원 계단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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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팅으로 만나 남편과 교제를 시작했던 것은 남편의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서로 찾지 못했기에 남편과 나는 결혼까지 할 수 있었다. 물어보진 않았지만, 남편 역시 나와 똑같은 이유로 결혼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만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 결혼했고, 부부가 되었다. 서로 죽도록 사랑해서 결혼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우리의 결혼생활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정말로 우리는 오래전부터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처럼 트러블 없이 잘 지낼 수 있었다. 아마도 서로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남들처럼 알뜰살뜰 돈을 모아 집을 샀고, 아이도 낳았고, 그 아이가 커가는 것을 지켜보며 이렇게 안정적인 생활이 행복이거니 생각하기도 했다. 때문에 남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리석은 믿음은 결국, 산산이 부서졌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진 자신의 감정을 수줍은 12살 소년처럼 고백했다. 처음에는 화도 나지 않았다. 남편이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편은 그런 엄청난 고백을 하고 집을 나가버렸다. 아빠를 찾는 아이의 칭얼거림을 들으며, 나는 나 자신이 아침드라마 여주인공이 되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깨달음을 얻은 후, 나는 드라마 속 배우처럼 남편에게 표독스러운 아내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전화를 받을 때까지 전화를 했고, 끝까지 전화를 받지 않으면 회사까지 찾아가기도 했다. 나의 무모한 역할극에 남편은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엔 기뻤다. 남편이 내 절규를 들어 준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편은 내게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만난 아이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남편은 신혼여행 때 샀던 여행 가방을 꺼내 자신의 짐을 차곡차곡 집어넣었기 시작했다. 내가 주저앉아 울기 시작하자, 아이도 따라 울었다. 하지만, 그 처절한 울음도 남편을 막지 못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나는 남편의 구두를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렇게라도 남편이 나를 떠나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남편은 개의치 않았다. 한쪽 구두만 신은 채, 남편은 커다란 여행 가방을 끌고 기어이 집을 나가버렸다.
집을 나간 후에도 남편은 전화를 걸어 수시로 내게 이혼을 요구했다. 처음엔 미안해하는 것 같았지만, 날이 갈수록 남편은 빚 독촉을 하는 사채업자처럼 뻔뻔하게 이혼을 요구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머리털 나고 처음 사랑에 빠졌다며 내게 고백했을 때만 해도, 나는 남편이 우리의 결혼을 이렇게 헌신짝처럼 여길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남편은 우리의 결혼을, 내 신성한 가정을 완전히 날려 버리고 싶어 했다. 나는 그런 남편의 무책임함이 뻔뻔하고 역겨웠다. 그래서 남편의 요구를 절대 들어주지 않기로 마음먹고 남편의 상황을 집안 식구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모두 알렸다. 다행히 주변 사람들은 모두 내 편이 되어 주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남편을 비난했고 나를 옹호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남편은 더 완고하게 버텼다. 그렇게 나는 집안 식구들과 친구들에겐 온갖 동정을 받는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었지만, 남편에겐 소름 끼치는 악녀가 되어버렸다. 결국, 오래 버티지 못하고 나는 남편에게 항복 메시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나는 막장드라마 여주인공을 맡을 만한 감량이 안 되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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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계단에 거의 다 올라왔을 무렵, 남편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남편은 전화를 받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망설이다가 마지막 전화벨이 울리기 직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제가 현진우입니다. 네? 뭐, 뭐라고요?”
남편은 하얀 석고 조각상처럼 얼굴이 변하더니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남편에게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도대체 왜 그러냐고? 남편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혼잣말처럼 내게 말했다.
“세미가 죽었대. 세미가…….”
남편이 그토록 사랑했던 여자의 이름이 바로 세미였다. 내 심장도 잠시 멈췄다. 남편은 그런 내 얼굴을 보고 귀신을 본 사람처럼 뒷걸음치더니 바로 달아나 버렸다. 나는 그런 남편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한참 동안 법원 앞에 서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법원 앞에서 나는 항상 내 편이 되어 주었던 시누이의 전화를 받고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세미라는 여자는 최근까지 내 남편이 가정이 있는 사람인지 몰랐었다고 했다. 원래 그녀는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간 아버지를 평생 증오하며 살았던 사람이었는데, 내 남편이 자식과 부인을 버리고 이혼을 하려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20년 넘게 피해자였던 그녀가 하루아침에 가해자가 된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남편에게 용서받을 수 없는 벌을 주고 싶었던 것일까?
무슨 정신으로 집으로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안방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제 나는 웃어야 하는 걸까? 울어야 하는 걸까? 거울을 보고 있는 내 표정이 왠지 모르게 어색했다. 지금 내가 웃는 다면 나쁜 여자가 되는 걸까? 그렇다고 울어버리면 또 너무 가식적인 여자가 되는 걸까? 분명한 것은, 이제 더 이상 나는 비련의 여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미친 여자가 되어 웃다가 울었고, 울다가 웃었다.
사랑스러운 나의 민정이가 시집을 간다고 합니다. 처음 그 소식을 듣고 한동안 나는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믿을 수도 믿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민정이가 처음 고개를 가누고, 처음 앉고, 처음 걸었던 순간들을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민정이가 성장했던 그 모든 순간마다 항상 민정이 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치원 시절 민정이는 저녁 시간이 되면 2층 베란다에서 그날 배웠던 노래와 춤을 추며 아버지를 기다렸던 모습도, 사춘기 시절 처음으로 엄마한테 대들던 모습도, 대학생이 되어 처음 화장을 하던 모습까지 모두 기억합니다. 그래서일까요? 민정이의 결혼은 기쁜 마음만큼 아쉽고, 아쉬운 만큼 또 기쁘기도 합니다.
민정이 결혼식 바로 전날, 209호 민정이네 집은 좀처럼 전등불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민정이네 식구들이 모두 거실에 모여 함께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민정이네 식구들은 거실에 이불을 펴놓고 모두 함께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새벽,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일어난 민정이 어머니는 잠이 들어 있는 민정이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봅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애틋한지 하마터면 이파리에 맺힌 이슬을 떨어뜨릴 뻔했습니다. 알람 소리가 들리자, 민정이가 뒤척이며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러는 사이 민정이 어머니는 언제 그랬나 싶게 민정이의 마지막 아침 식사 준비를 합니다. 결혼 전 가족들의 마지막 아침 식사를 마치고 민정이 아버지는 제일 먼저 아파트 현관으로 나와 자동차에 올랐습니다. 민정이 아버지가 시동을 걸자마자, 민정이가 민낯으로 집 밖을 나왔습니다. 물론, 엄마와 여동생도 함께 나왔습니다. 세 모녀 손에는 마치 이사를 가는 사람들처럼 짐이 한가득 들려있습니다. 그렁그렁한 엔진 소리를 내며 아파트 주차장을 벗어나는 민정이네 자동차를 끝까지 바라보며 나는 이파리에 맺혀 있던 이슬방울을 뚝뚝 떨어뜨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