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의 축복과 함께 예쁜 이름까지 선물 받은 민정이가 정말 부럽습니다. 사람도 아닌 존재가 사람을 부러워한다는 것은 조금 웃기는 얘기겠지만, 어쨌든 나는 부럽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봅니다. 나처럼 볼품없는 나무도 사람들은 이름이란 것을 지어주었을까요? 사람들은 세상 만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을 좋아하니, 분명 내게도 이름이라는 것이 있지 않을까요? 긍정적인 생각을 해보려고 해도 자꾸만 걱정이 됩니다. 내게 이름이 있다 해도 근사한 꽃과 열매도 없이 그저 그늘밖에 만들어내지 못하는 내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줄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따라 왜 그렇게 그 사실이 속상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나무들만 사는 세상에서 계속 살았다면, 이런 서운함은 생각조차 못했을 겁니다. 괜히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 살다 보니 쓸데없는 욕심만 늘어납니다. 어떻게든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이름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개나리, 진달래처럼 예쁜 이름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회양목이나 은행나무처럼 멋진 이름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그저 그 누군가에게 내 이름이 불릴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꽤 행복할 것 같습니다.
어김없이 겨울이 가고 또 다른 봄이 찾아왔습니다. 209호 민정이는 무럭무럭 자라 지난달에는 100일 잔치까지 했습니다. 처음에는 눈도 잘 뜨지 못하는 못생긴 갓난아기였는데, 이젠 제법 눈, 코, 입도 갖추고 귀여움까지 장착해서 누구보다 예뻐 보입니다. 처음에는 꼼짝 못 하고 입만 뻥긋거리던 민정이가 지금은 손과 발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까르르 웃기도 합니다. 밤마다 깨어나 우는 습관은 여전했지만, 그 정도의 불편함은 민정이의 사랑스러움으로 극복할만합니다. 민정이가 까르르 웃는 소리만 들어도 피곤함이 절로 풀리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는 민정이가 처음으로 유모차를 타고 아파트 놀이터로 나왔습니다. 이른 봄이라 아직 썰렁했지만, 민정이라는 존재 하나만으로 놀이터는 신기할 정도로 포근하고 아늑하게 느껴졌습니다. 민정이는 처음 보는 바깥세상이 신기했는지 연신 방긋방긋 웃었습니다. 그런 민정이의 웃음 덕분에 놀이터 앞 벤치는 오랜만에 105동 아파트 주민들로 북적입니다. 북적이는 무리들 중에는 민정이가 태어난 날 1등 공신이었던 208호 아주머니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데, 한 청년이 105동 현관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입니다. 208호 아주머니는 그 청년을 보고 다정하게 이름을 불렀습니다.
“현석아! 어디 가니?”
“수업이 있어요.”
“그래, 잘 다녀와! 근데, 오늘은 들어오는 거지?”
“네, 다녀오겠습니다.”
현석이라는 이름을 가진 청년은 208호 아주머니 아들 현석이었습니다. 주로 새벽이나 밤에만 들락거리는 청년이어서 오늘에야 그 청년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습니다. 얼굴이 창백하고 고집스러운 이마를 가지고 있는 청년은 아마도 대학생인 것 같습니다. 수업이 있는데, 교복을 입지 않고 꽤 늦은 시간에 학교에 가는 걸 보면 대학생이 분명합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핼쑥한 얼굴로 돌아서는 현석이의 뒷모습을 208호 아주머니는 꽤 오랫동안 바라봅니다. 아마도 208호 아주머니 눈에는 현석이의 뒷모습이 왠지 모르게 쓸쓸해 보였나 봅니다. 하지만,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208호 아주머니의 뒷모습이 내게는 훨씬 더 쓸쓸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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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신호탄이 발사되듯 개나리가 화려하게 꽃망울을 터뜨렸습니다. 봄꽃의 향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자금자금한 산수유 꽃으로 시작해서, 목련, 개나리, 진달래가 차례로 피어나는 과정은 사람들에겐 무척 아름다운 시간으로 기억되겠지만 그 과정을 겪어내는 나무들에게 봄은 1년 중 가장 잔인하고 혹독한 시간입니다. 겨우내 단단해진 나무껍질을 뚫고 여린 꽃봉오리를 내미는 일은 산모가 아이를 낳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진분홍 진달래 꽃잎이 떨어질 때쯤이면, 우아한 벚꽃나무가 꽃망울을 터뜨립니다. 팝콘 터지듯 만개해 버린 벚꽃은 한 밤중에도 눈이 부실만큼 화사하고 아름답습니다. 불그스레한 아기의 볼처럼 연분홍 꽃잎이 눈송이처럼 흩날릴 때쯤이면, 거친 나뭇가지를 뚫고 나온 갖가지 연두 이파리들이 꽃망울보다 더 예쁘게 피어납니다. 그때마다 나무들은 또 얼마나 몸살을 앓는지 모릅니다. 그런 몸살을 매년 견뎌내야 나무는 한 뼘이라도 더 성장할 수 있습니다. 문득, 이렇게 힘든 세상에서 왜 우리는 온갖 고생을 겪으며 기어코 살아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부득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려 애를 쓰는 걸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 답을 찾으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꽃이 활짝 피었을 때는 꼼짝도 하지 않았던 301호 아저씨가 여린 이파리들이 돋아나기 시작하자 다시 관찰일기를 쓰기 위해 아파트 단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 시작합니다. 아마도 아저씨는 화려한 꽃들보다 수려한 나무 이파리들을 더 좋아하나 봅니다. 물론 아가들의 손가락처럼 고물고물 한 연둣빛 이파리들이 피어났다고 해서 봄꽃의 향연이 다 끝난 것은 아닙니다. 진달래와 비슷해 보이는 철쭉과 라일락이 그 뒤를 잇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나는 수많은 봄꽃 중에서 라일락을 가장 좋아합니다. 누군가는 올망졸망한 라일락이 볼품없는 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바람을 타고 우연히 날아든 라일락 꽃향기를 맡아본 이들은 알 겁니다. 라일락 꽃향기가 얼마나 많은 추억들을 소환하게 만드는지. 그래서일까요? 짙은 라일락 꽃향기가 흩날리는 5월이면 길을 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잠시 서 있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누군가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라일락 향기가 희미해지면, 덩굴장미들이 잔뜩 웅크렸던 꽃망울을 터뜨립니다. 짙은 향기뿐만 아니라 고혹적인 자태를 자랑하는 붉은 장미는 라일락과 또 다른 이유로 사람들을 매료시킵니다. 물론, 볼품도 매력도 없는 나도 그때쯤이면 꽃을 피웁니다. 하지만, 내가 피워내는 꽃은 향기도 없고 꽃망울도 눈에 띄지 않아서 사람들은 내가 꽃을 피우는지조차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꽃을 피워내는 지금 이 순간들이 가장 외롭고, 민망하고, 부끄럽습니다.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는데, 왜 이렇게 나는 나 자신이 부끄럽고 한심해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주변에 보이는 멋진 나무들과 비교가 돼서 그런 것 같습니다. 나와 달리 105동 주변에 심어진 나무들은 그 나름대로의 매력이 정말 많아 보입니다. 화려한 봄꽃은 아니지만, 가을이 되면 진가를 발휘하는 단풍나무와 은행나무가 그렇습니다. 감나무는 늦가을이 되면 탐스런 주홍빛 열매를 만들어 사람들과 새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습니다. 아파트 입구 쪽에 서 있는 소나무들은 고고한 자태와 카리스마로 그 존재감이 언제나 남다릅니다. 큰 대로변에 서 있는 덩치가 큰 플라타너스는 잎이 크고 무성해서 사람들에게 만족스러운 범위의 그늘을 만들어 줍니다. 105동 반대편 끝에 서 있는 꺽다리 메타세콰이아는 아파트 단지에서 제일 큰 키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메타세콰이아는 301호 아저씨가 회양목 다음으로 이름을 불러준 나무였습니다. 아저씨가 저렇게 어려운 이름을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나처럼 이렇다 할만한 특색도 재주도 없는 나무는 이 아파트에 없는 것 같습니다. 키도 그리 크지 않고, 이파리도 풍성하지 않아 꽃도 열매도 수형도 볼품이 없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나무에 관심 많은 301호 아저씨조차 제게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에 왜 그렇게 목을 매냐고 누군가 묻는 다면, 사실할 말은 없습니다. 동화책에 나온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사람들은 나무가 모든 것을 참고 보듬어 주는 존재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렇지만 나처럼 사람들 주변에 심어진 나무는 애초부터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을 받기 위해 심어진 나무입니다.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사람 곁에 심어진 나무는 사람의 관심을 받아야만 행복할 수 있는 겁니다. 못나고 모자라서 사람의 관심을 받을 수 없는 내가, 그래서 원망스럽습니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화를 낼 수도 없습니다. 미친 듯이 쏟아지는 소낙비처럼 시원하게 화라도 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라앉기만 하는 안개처럼 그렇게 스멀스멀 서러움이 내 안에 자꾸만 스며듭니다. 그렇게 스며든 서러움은 그 어떤 상처보다 깊고 아린 법입니다.
봄꽃의 향연이 끝나고 본격적인 녹음의 계절이 시작되자, 아파트 단지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답답한 것은 그 흉흉한 소문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 소문 들었어요? 빨갱이들 때문에 비상 계엄령이 내렸대요.”
“아휴, 또?”
“이번에는 심상치가 않아요. 대통령도 지금 없고.”
“그래도 군인들이 뭐라도 하겠죠.”
“우리 엄니가 순천에 사시는데, 광주에서 큰일이 난 것 같대요. 얼마 전부터는 광주에는 가고 오지도 못하게 길을 완전히 막아 놨다고 하더라고요.”
“도대체 무슨 일이래?”
“얼마 전에 빨갱이들이 광주로 내려가서 폭동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있어요.”
“에이, 설마!”
“그거 막으러 간 군인들도 많이 다치고 죽었다는데요?”
“설마 이러다 또 전쟁 나는 거 아냐?”
“아휴, 그니까요. 무서워 죽겠어요.”
“아니 근데, 빨갱이들은 왜 광주까지 내려갔대? 서울에서 안 하고.”
“그러니까 더 이상하다는 거죠.”
“그러다 서울에도 폭동이 일어나는 건 아니겠죠?”
“아무래도 그럴 확률이 크지. 빨갱이라면 서울에 더 많을 거 아냐? 순진한 대학생들 꼬드겨서. 어제도 시내에선 난리가 났었다고 그러던데.”
“저기 현석 엄마! 현석이 단속 좀 시켜요. 빨갱이들한테 휘둘리지 말라고.”
한 아주머니의 갑작스러운 충고에 208호 아주머니 얼굴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결국 208호 아주머니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도대체 이번 일이 현석이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날 밤, 더 이해하지 못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별도 달도 고요해서 경비 아저씨마저 잠이 든 시간이었습니다. 아파트 현관 쪽에서 누군가 살금살금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놀이터 앞 가로등 앞에 와서야 나는 그 누군가가 208호 아주머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208호 아주머니의 행동이 조금 이상했습니다. 아주머니는 커다란 검은색 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뭔가 불안한 것처럼 연신 사방을 둘러보며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열 번쯤 확인하고 나서야, 208호 아주머니는 그 검은 가방을 내 앞에 있는 벤치 뒤에 끼워 넣습니다. 그리고는 누가 볼세라 종종걸음으로 다시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설마, 쓰레기를 버리고 가신 건가? 아니면, 설마 폭탄? 요즘 TV를 많이 봐서 그런지, 쓸데없는 상상력만 늘어납니다. 어쨌든 가방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왜 이 한밤중에 검은 가방을 벤치 뒤에 숨겨두었는지 궁금할 뿐입니다.
미명이 어슴푸레 어둠을 비집고 끼어들 무렵, 검은 모자를 쓰고 검은 옷을 입은 누군가가 놀이터 앞 벤치로 걸어왔습니다. 모자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습니다. 복장만 봐도 충분히 두려운 존재였기 때문에 내가 아는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어느새 그 무시무시한 남자가 내 앞에 있는 벤치 앞까지 다가왔습니다. 잔뜩 긴장을 하고 있는데, 두리번거리던 남자가 벤치에 털썩 주저앉습니다. 그리고는 모자를 훌렁 벗습니다. 순간, 숨이 막힐 정도로 매운 기운이 남자의 머리카락과 옷깃에서 일어났습니다. 한 번도 맡아보지 못했던 공기의 입자였습니다. 내가 만약 사람이었다면, 기침을 심하게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민한 이파리들이 간질거리는 것 같았지만, 나는 아무런 대응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모자를 벗은 남자가 갑자기 고개를 획 돌려 나를 쳐다봤습니다. 순간, 얼어붙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돌아본 남자의 얼굴이 아는 얼굴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얼굴은 분명 208호 아주머니의 아들, 현석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현석이는 나를 돌아보기 위해 고개를 돌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208호 아주머니가 두고 간 검은색 가방을 찾고 있었던 겁니다. 어렵지 않게 검은 가방을 찾은 현석이는 바로 가방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습니다. 가방 안에는 옷가지 몇 개와 삶은 달걀 한 봉지, 그리고 하얀 편지 봉투가 들어 있었습니다. 현석이는 하얀 봉투를 제일 먼저 집었습니다. 봉투 안에는 얼마의 돈과 편지 한 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현석이가 벤치에 앉아 자꾸만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편지의 내용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나는 그 편지의 내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현석이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이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편지를 읽으며 한참 동안 벤치에 앉아 있던 현석이는 편지를 고이 접어 다시 가방에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삶은 달걀을 하나 꺼내 껍질을 까더니 통째로 입에 넣었습니다. 퍽퍽한 달걀 때문인지, 눈물 때문인지, 현석이는 자꾸만 가슴을 두드립니다.
어느새 동쪽 끝에서 해의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현석이는 벤치에 앉아 꼼짝 하지 않습니다. 그때, 오늘 근무하는 경비아저씨가 주차장 쪽으로 걸어 들어왔습니다. 보통 이 시간 때쯤 경비 아저씨들이 교대를 하기 때문입니다. 현석이는 경비아저씨를 보고 놀랐는지,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품에 간직하고 있던 누런 편지봉투를 꺼내 벤치 뒤에 끼워 넣었습니다. 현석이의 행동이 수상해 보였는지 경비아저씨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현석이를 노려봅니다. 재바른 현석이는 검은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파트 뒷문 쪽으로 달아납니다. 그제야 경비아저씨는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다행히 경비 아저씨는 현석이가 벤치에 끼워둔 편지 봉투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다행입니다. 벤치 뒤에 삐죽하게 튀어나온 편지봉투에 이렇게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님께>
가지라도 힘껏 뻗어서 그 편지봉투를 208호 아주머니에게 전달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조금의 미동도 할 수 없는 나는 그저 그 편지가 208호 아주머니에게 무사히 전달될 수 있기를 기도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