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아파트에게>
오후 햇살을 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다 보니, 어느새 내 가지와 이파리들은 105동 아파트 베란다를 살짝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자랐습니다. 105동 아파트의 실내 모양이 어떤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내 오른편에 서 있는 절벽바위, 그러니까 105동 아파트는 12층으로 이루어진 아파트였습니다. 그 층마다는 9개의 집이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 그 집이 놓인 순서대로 숫자를 붙여 구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숫자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된 것은 라디오를 통해서가 아니라 202호에 살고 있는 꼬마 세찬이 덕분입니다. 세찬이는 매일 아침마다 할머니와 함께 놀이터에 놀러 나오는 녀석인데, 요즘 보이는 것마다 숫자를 세느라 누구보다 바쁜 녀석입니다. 처음에는 꼬마 세찬이가 외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세찬이가 보이는 것마다 하나, 둘, 셋을 외친 덕분에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숫자에 대한 개념을 생겨 버렸습니다. 한 번은 녀석이 내 나뭇가지에 달린 이파리를 새느라 고생하는 것을 보고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내 이파리를 세다가 지친 세찬이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기 때문입니다.
**1978년 9월 105동 202호 세찬이 이야기**
“세찬아! 엄마 금방 갔다 올게. 할머니랑 잘 놀고 있어.”
세찬이는 눈을 뜨자마자 그렇게 엄마와 짧은 이별을 했다. 처음엔 매달려도 보고, 울어도 봤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그저 이상할 뿐이다. 왜 엄마는 매일 아침 사라졌다가 저녁이 돼서야 나타나는 걸까? 생각해 보면 엄마가 매일 아침 외출을 하기 시작한 것은 아파트라는 곳에 이사 온 후부터였다. 아니, 아빠라는 사람이 사라지고 난 뒤부터였나? 어쨌든 세찬이는 지금 아빠 없이 엄마랑 할머니랑 함께 살고 있었다. 엄마가 그렇게 매정하게 외출을 하고 나면, 느릿느릿한 할머니가 이불 위에서 뒹굴 거리는 세찬이에게 아침밥을 차려주었다. 그때마다 세찬이는 생각했다. 할머니라도 곁에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할머니, 나 요구르트!”
계란프라이에 밥을 후딱 비벼먹고, 세찬이는 바로 요구르트를 찾았다. 언제나 아침밥을 먹고 나면 상처럼 주어지는 요구르트였다. 세찬이는 그 요구르트가 자신의 진정한 아침밥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할머니는 한숨을 길게 쉬고 냉장고에서 요구르트를 하나 꺼냈다. 세찬이가 쪼르르 달려오는 것을 보고, 할머니는 세찬이에게 요구르트 뚜껑을 따주려고 했다. 하지만, 세찬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따지 마. 따지 마!”
할머니는 느릿한 한숨을 쉬고, 요구르트 뚜껑을 자신의 치마로 쓱쓱 닦아 내고 세찬이에게 요구르트를 건넸다. 세찬이는 요구르트를 받자마자, 여린 옥수수 알만큼 작은 앞니로 요구르트의 뚜껑을 뽕하고 뚫었다. 달콤한 물이 입안에 가득 퍼질 때쯤, 세찬이는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요구르트 병을 입에 물고 세찬이는 아주 조금씩만 달콤한 물을 빨아 마셨다. 그러다 보면, 목구멍에 밥풀 같은 것이 끼어 몇 번씩 기침이 나기도 했다. 세찬이가 요구르트 때문에 행복해지는 사이, 세찬이 할머니는 설거지를 했다. 세찬이가 요구르트를 다 빨아 마시고 요구르트 병으로 피리를 불 무렵, 할머니의 설거지도 끝이 났다. 할머니가 손에 묻은 물을 치마에 툭툭 털어 내자, 세찬이는 요구르트 빈 병을 할머니에게 내밀며 말했다.
“요구르트 하나 더!”
“안 돼. 요구르트는 하루에 한 개!”
“에이, 하나 더! 하나 더!”
“안 돼. 다섯 살 되면 하나 더!”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래, 우리 세찬이 똑똑하네. 지금 세찬이는 넷이라 안 되는 거야.”
“할머니, 근데 아빠는 언제 와?”
“열 밤 자면.”
“열 밤 지났는데?”
“그럼, 백 밤 자면.”
“그럼, 엄마는 언제 와?”
“세찬이가 열을 세면.”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 여덟?”
“여섯!”
“아! 여섯, 일곱, 여, 여덟, 아홉, 열! 엄마 언제 와?”
“세찬이가 백을 세면.”
“근데, 할머니! 세찬이는 백까지 셀 줄 모르는데?”
“알아. 우리 놀이터 갈까?”
“응!”
세찬이의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 현관문을 나서는 할머니는 긴 한숨을 쉬었다. 세찬이는 뭐가 그렇게 신이 났는지 계단을 내려가며, 한 계단 한 계단을 계속 숫자로 세기 바빴다. 요즘 세찬이는 하루 종일 눈에 보이는 것마다 숫자를 세고 또 세는 버릇이 들었다. 한 번은 놀이터 옆에 서 있는 나뭇잎을 세다가 숨이 넘어갈 뻔도 했다. 그렇게 고생을 하고도 세찬이는 숫자를 세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야 일 나갔던 엄마도, 사라진 아빠도 다시 돌아올 것 같았다.
105동 안에는 100개도 넘는 집들이 모여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아직 100이 넘어가는 숫자를 센 적이 없기 때문에 정확하진 않습니다.) 어떻게 사람들은 이렇게 많은 집을 한 곳에 몰아넣을 생각을 했을까요? 그런 면에서 사람들은 정말 대단한 존재 같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첫 번째 고층 아파트라는 사실 만으로도 투자가치가 충분할 겁니다. 중앙 온수난방이라 겨울에도 수도꼭지를 틀기만 하면 따뜻한 물이 나오고, 양변기는 물론 몸 담그는 욕조까지 있는 거 보셨죠?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 아파트에 살게 되면, 공중목욕탕에는 다닐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아휴, 근데 아파트가 너무 높아서 현기증 날 거 같아요. 사람이 땅에서 너무 멀어지면 몸에 안 좋다던데.”
“아이고, 사모님! 그건 정말 옛날 말씀이세요. 요즘 아파트는 좀 높아야 전망도 좋고, 나중에 팔 때 집값도 훨씬 더 비싸게 쳐준다니까요. 저기 7층부터 10층까지는 로열 층이라고 평당 가격도 다른 층 보다 훨씬 높아요. 그리고 자동으로 움직이는 엘리베이터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에요? 계단으로 오르락내리락해야 하는 5층짜리 아파트와는 차원이 다른 거죠.”
“그럼 관리비가 비싸지 않을까요?”
“관리비만 놓고 보면 처음에는 좀 비싸 보이겠죠. 이건 사모님한테만 말씀드리는 건데, 실제 난방비를 계산해 보면 저 옆 동네에 있는 5층짜리 주공아파트랑 별 차이 안 납니다. 생각해 보세요. 거기 5층 아파트는 아직 연탄을 때야 하는 아파트잖아요. 연탄 값도 별도로 드는데, 연탄가스 걱정까지 해야 하고. 그런데 이 아파트는 관리비만 꼬박꼬박 내면 알아서 난방까지 다 해주니까 연탄을 살 필요도 없고, 연탄가스 같은 건 더더욱 걱정할 필요도 없으니 실질적으로는 그리 비싼 게 아니라는 소리죠.”
“근데, 이 동은 바로 뒤에 초등학교가 있어서 좀 시끄럽지 않을까요?”
“에이, 무슨 그런 말씀을. 학교 다니는 아이들 있는 집은 오히려 학교랑 가까워서 좋다는 분들이 많아요. 뭐 그래도 사모님이 싫으시다면 저기 안쪽에 있는 동에도 매물이 하나 나온 게 있는데. 그쪽으로 한번 가보실래요?”
“네, 한 번 더 보죠.”
부동산 아저씨와 낯선 아주머니가 앉았던 벤치 위에는 이제 별이 그려져 있는 초록색 음료수 병 두 개만 덩그러니 남았습니다. 그 초록색 음료수 병에서 달콤한 향이 솔솔 올라오는가 싶더니, 꿀벌 한 마리가 그 주변을 윙윙거리며 맴돕니다. 꿀벌은 그 음료수 병에 꿀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착각할 만도 합니다. 내가 꿀벌이었다면, 아마도 그 초록색 병에 퐁당 빠져 버리고 싶었을 겁니다. 문득, 초록색 음료수 병 근처를 윙윙거리며 날고 있는 꿀벌들이 부럽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면 정말 얼마나 신이 날까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부럽습니다.
키 작은 경비아저씨가 요란한 초록색 병을 발견했는지 벤치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옵니다. 음료수 병을 맴돌던 꿀벌을 손으로 휘휘 내쫓더니 병을 들고 내용물을 확인합니다. 처음엔 아저씨가 먹다 남은 음료수를 마시려고 하는 줄 알았는데, 경비 아저씨는 남아 있던 음료수를 내 뿌리 주변에 가차 없이 부어버립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설마 아저씨가 내 마음을 알아챈 걸까요? 그리고는 무심하게 두 개의 병을 한 손에 들고 유유히 경비실로 사라집니다. 아무래도 키 작은 경비 아저씨는 그 달콤한 음료수보다 그 초록색 병이 더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음료수가 없는 빈 병은 나중에 다시 돈으로 바꿀 수도 있다고 합니다. 어쨌든 나는 그 덕분에 달콤한 음료수를 처음으로 맛보았습니다. 그런데 음료수가 그 달콤한 향만큼 달콤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대신 달콤한 음료수 때문에 꿀벌이 아니라 파리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내 주변을 떠나지 않아 한동안 힘들었습니다.
5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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