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아파트에게>
날카로운 통증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몸뚱이 맨 아랫부분이 무언가로 칭칭 싸매져 있었습니다. 단단하게 지탱해 주던 내 뿌리가 어이없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자 내 몸뚱이는 바로 서 있지도 못하고 어딘가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치욕적인 상황 속에서 내가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흔들림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 규칙적인 부대낌과 함께 바람의 방향과 강도 역시 아주 규칙적입니다. 신기하게도 하늘의 구름도 그 바람의 강도만큼 빠르게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가르쳐 주진 않았지만, 어렴풋이 지금 이 상황을 왠지 이해할 것 같기도 합니다. 아마도 나는 그 포악스러운 존재들에게 사로잡혀 어딘가로 끌려가고 있는 모양입니다. 잘려나간 가지와 뿌리 부분은 얼얼해지고, 파릇파릇하던 내 이파리들도 시들시들해진 것 같습니다. 이러다 벼락이라도 맞게 된다면 꼼짝없이 타 죽을 것도 같습니다.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겠다 싶은 순간, 갑자기 주변의 공기와 풍경들이 달라지는 것을 느낍니다. 뭉게구름처럼 뭉글거리던 풍경들도 사라지고 점점 각이 지고 날카로운 풍경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매우 시끄러운 굉음들이 끊이지 않고 들립니다. 각진 바위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줄지어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낯설어 보였던 것은 하늘입니다. 늘 바라보던 하늘이 각진 바위들의 높낮이로 이리저리 조각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하늘에 담겨 있던 몽실한 구름까지 검은 선들로 이리저리 쪼개집니다. 문제는 그 모양이 무척 기괴하고 흉측해 보였다는 겁니다.
큰일 났습니다. 포악한 존재들이 언제 팠을지 모를 어설픈 구덩이에 나를 마구잡이로 집어넣고 있습니다. 거칠고 푸석한 땅속에 나를 집어넣더니, 이제는 걸쭉하고 검은흙으로 내 아랫도리를 마구 덮기 시작합니다. 어느 정도 구덩이가 채워졌다고 생각했는지 그들은 내 주변 땅을 그들의 거친 발로 꾹꾹 눌러 밟습니다. 덕분에 언제 났을지 모를 상처들이 다시 찌릿하게 아려옵니다. 고통으로 아득해지는 순간, 누군가 내게 소낙비 같은 물을 뿌려줍니다. 덕분에 타들어 갈 것 같았던 내 갈증은 폭삭 풀어집니다. 그런데 무언가 좀 이상합니다. 똑바로 서 있던 몸뚱이가 자꾸만 왼쪽으로 기울어지는 것 같습니다. 포악한 존재들도 놀랐는지 자꾸만 기울어지는 나를 부여잡더니 나와 비슷한 재질의 막대기 몇 개로 내 몸뚱이를 받쳐줍니다. 포악했던 존재들에게 처음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포악하지만 고맙기도 했던 그 존재들의 이름은 바로 사람이었습니다.
소름 끼치는 기계소리가 아침부터 들리자, 다시 초조해졌습니다. 어제처럼 그 기계가 다시 나를 싣고 어디론가 떠나지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대신 나와 조금 다르지만 같은 존재들이 그 이상한 기계 위에 빼곡하게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도 그 존재들도 나처럼 이곳에 끌려와 거친 땅에 파묻힐 예정인가 봅니다. 예상했던 대로 사람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친 땅 여기저기에 다양한 크기의 구멍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기계 위에서 조용히 대기하고 있는 나와 비슷한 존재들을 바라보며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나는, 아니 그들은 무엇일까? 왜 이곳에 끌려와 이런 수모를 당하는 걸까? 그때, 갑자기 구덩이를 파던 포악한 사람이 소리쳤습니다.
“여기, 나무 좀 더 가져다줘!”
그제야 알았습니다. 나와 비슷하지만 다른 존재들을 사람들이 나무라고 부른 다는 것을. 어느새 내 앞에 펼쳐져 넓은 땅에 그 나무들이 하나둘씩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비슷한 존재들이라는 생각에 가지라도 흔들어 인사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오늘따라 바람 한 점 불지 않습니다. 이럴 때는 정말 꼼짝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답답한지 모릅니다.
며칠이 지나자 주변에 나무들이 제법 채워졌습니다. 제일 먼저 이곳에 도착했던 나는 어느새 상처 입었던 뿌리도 거의 아물었고, 퍽퍽하기만 했던 거친 땅에도 적응을 해나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걱정거리 하나가 생겼습니다. 해가 하늘 중천을 넘어가고 나면 내 옆에 서 있는 절벽처럼 답답한 바위 때문에 해님이 내려주시는 양기를 온전히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이 커다란 바위가 무척 거슬렸습니다. 이 각진 바위는 산보다는 작았지만 언덕보다는 커서 올려다보면 하늘이 까마득해 보일 정도로 키가 컸습니다. 도대체 이 각진 바위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궁금한 마음에 괴상한 바위를 찬찬히 살펴보다가 바위 한 구석에 그려져 있는 커다란 그림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105 ’
이게 뭐지? 그냥 무늬인가? 각진 바위의 정체가 무엇인지, 바위에 그려진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쨌든 지금 이 상황에서 나는 그저 최선을 다해 가지를 뻗을 수밖에 없습니다.
각진 바위와 햇살을 나누는 일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무렵, 어디선가 다시 시끄러운 기계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덕분에 다시 초조하고 불안해집니다. 기계소리 때문이 아니라 그 기계를 타고 나타난 사람들 때문입니다. 물론 그 사람들은 예전에 보았던 포악한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커다란 기계에 짐을 잔뜩 실고 나타나더니 그 짐들을 모두 바위 안으로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처음에는 바위가 사람들과 그 짐들을 모두 먹어 치우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이러다 무시무시한 바위가 나까지 먹어치우면 어쩌나 걱정도 했습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오해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바위가 사람들과 사람들의 짐을 삼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바위 안에 짐을 구겨 넣고 있었습니다. 낯선 사람들이 들고 온 짐들은 모두 내가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들이었습니다. 대부분 네모나고 미끈한 물건들이 많았는데, 사람들이 저 많은 물건들을 가지고 도대체 무엇을 하는지 정말 궁금했습니다. 이제 햇살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보기 위해서라도 나는 좀 더 가지를 힘껏 뻗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짐을 싣고 나타나는 사람들의 수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습니다. 덕분에 한적했던 이곳은 이제 제법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으로 바뀌었습니다. 뭐 이제는 별로 불편하지도 않습니다. 처음 봤던 포악한 사람들과 달리 짐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은 무척 온순하고 친절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크기나 생김새가 아주 다양했습니다. 아주 작고 귀여운 사람부터 머리가 하얀 사람, 키가 큰 사람, 작은 사람, 뚱뚱한 사람, 마른 사람 등등. 덕분에 나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이 누구인지 바위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곳 사람들을 지켜보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아저씨, 105동 아파트가 어디예요?”
“아, 여기요. 저쪽으로 돌아가면 현관이 보일 거예요.”
“감사합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묻고 답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제야 나는 무지막지하게 큰 바위들을 사람들이 아파트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내 옆에 서서 소중한 햇살을 훔쳐갔던 바위 이름이 105동이라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렇게 답답했던 궁금증들이 하나둘씩 풀리면서,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들었던 이야기 파편들이 하나의 퍼즐처럼 맞춰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왜 여기 사람들이 아파트라는 곳에 모여 사는지, 그 아파트들은 또 왜 이렇게 한 곳에 심어져 있는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습니다. 궁금증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끝이 없는 모양입니다. 궁금증이 풀리기가 무섭게 궁금한 것들이 예전보다 더 많아지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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