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낭만에 대하여...
“저기 좀 봐!"
재욱이 턱을 치켜들며 건너편 커피숍을 가리킨다. 영숙은 빠른 손 놀림은 멈추지 않은 채 힐끔 고개를 들어 재욱이 가리킨 곳을 바라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레이 톤으로 치장한 멋진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특히나, 할아버지는 로맨스 그레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게 하는 비주얼을 가지고 있어 얼핏 보면 아주 멋지게 늙어간 할리우드 영화 배우 같은 느낌도 들었다. 영숙은 힐끗 보고 나서, 아무 말없이 다시 일에 집중한다. 점심시간 끝날 때까지 20켤레 이상의 구두를 닦으려면 시간이 빠듯하기 때문이다.
“저 할아버지 멋지다. 그지?"
재욱의 말에 영숙은 다시 그 커피숍 안을 쳐다 본다. 그때, 할아버지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카운터로 가더니 쟁반에 커피 두 잔을 두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앞에 앉은 할머니가 수줍게 웃는 모습이 보였다. 할아버지 역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싱그러운 미소로 답했다. 그러더니, 마술사처럼 옆에 종이가방에 숨겨 두었던 예쁜 꽃다발을 할머니 앞에 내어 놓았다. 할머니는 CF에서나 나올 법한 표정으로 깜짝 놀랐다. 영숙은 그 광경을 그저 멍하니 쳐다 본다. 그러자 재욱이 영숙의 어깨를 팔로 툭 친다.
“턱 빠지겠다. 입 좀 닫아!"
그제야 정신이 든 영숙은 다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일에 집중한다. 그러자 이번엔 재욱이 그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쳐다본다. 커피숍 안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여전히 비 현실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번엔 영숙이 멍하니 쳐다 보고 있는 재욱의 팔을 툭 친다. 그러자 재욱이 길게 한 숨을 쉰다. 영숙은 말없이 눈빛으로 어서 일이나 하라는 표정을 짓는다.
“미안하다, 영숙아! 오빠도 저렇게 낭만적으로 나이 먹고 싶었다!”
영숙은 말없이 재욱을 째려 본다. 하지만, 곧 안쓰러운 표정으로 재욱을 쳐다 보게 된다. 재욱의 표정이 정말 미안해 보였기 때문이다. 영숙은 아니라고,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왠지 그런 말은 간지러워서 입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사실, 영숙은 나름 번듯한 회사에 다니던 회사원이었다. 그래서 영숙은 재욱과 결혼 하기 전만 하더라도 이런 곳에서 이렇게 구두를 닦고 있으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재욱과 결혼 후, 정말 순식간에 너무 많은 것들이 변했다. 영숙은 아이를 낳았고, 직장을 그만 두었다. 그리고 얼마 후 재욱도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재욱은 계속 사업 시작만 여러 번 했다. 결국, 재욱의 연이은 사업실패로 영숙은 지금 이렇게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영숙은 지금 이 생활에 나름 만족하고 있었다. 남들처럼 번듯한 직장은 아니지만, 운 좋게 자리를 잡은 구두수선가게는 나름 벌이가 괜찮았기 때문이다. 손 재주가 좋은 재욱은 대개 구두 수선을 하고, 손이 빠른 영숙은 구두를 닦았다. 사무실과 복덕방이 밀집한 지역이라 손님도 꾸준한 편이었다. 영숙은 큰 돈만 바라고 사업을 하던 재욱이 이렇게라도 안정을 찾아 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다. 그래서 영숙은 지금이 가장 행복한때라고 믿고 있었다.
문득, 영숙은 재욱의 구두망치질이 왠지 짠하게 들렸다. 현실적인 영숙에 비해 재욱은 꽤 낭만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금 구두 망치질을 하고 있는 재욱의 모습이 더 서글프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영숙은 재욱과 연애를 할 때, 재욱이 저 할아버지보다 백배는 더 낭만적이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하루 종일 한 평 남짓한 구두 방에 앉아있는 재욱은 어쩌면 그때를 더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재욱은 영숙과 달리 지금 이 순간을 가장 불행한 순간으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자 영숙은 재욱의 한숨 소리가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그래서 재욱을 한숨 쉬게 만든 멋진 할아버지가 괜히 미워졌다. 꼬인 마음으로 바라보니 할아버지의 모든 것이 맘에 들지 않는 것이다. 결국, 영숙은 무심한 말투로 한마디 내 뱉는다.
“아마도 자기 마누라가 아닐 걸? 저 나이 때 할아버지가 자기 마누라한테 저러겠어?"
그제야 재욱이 웃는다.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이다. 재욱이 웃는 걸 보고 영숙도 웃는다. 어느새 재욱이 멋진 휘파람을불기 시작한다. 재욱의 휘파람 소리를 들으며 영숙은 점심으로 무얼 먹을지 고민에 빠진다.
“툭, 툭, 툭!"
그때, 왼쪽 도로에서 이런 소리가 들린다. 아주 느리게 그리고 천천히. 영숙은 무슨 소리일까 고개를 빼고 왼편을 바라본다. 그때 갑자기 허리가 구부정한 할아버지가 바닥에 주저 앉는다. 그리고는 떨어져 있는 보도블록 조각을 집어 든다. 한참 후, 한 할머니가 양손으로 잡는 보조기를 집고 걸어 온다. 현재 영숙이네 구두수선가게 편 인도는 보도블록 공사 중이었다. 그래서 사방에 보도블록 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아마도 할아버지는 양손에 보조기를 들고 힘겹게 걷는 할머니를 위해 몇 발자국 앞서 걸으며 걸릴 법한 돌 조각들을 치우고 있는 것이다. 사실, 허리가 구부정한 할아버지도 보조기를 쓰며 걸어가는 할머니보다 건강해 보이지 않았다. 영숙은 할머니 몇 걸음 앞에서 바닥을 살피는 할아버지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영숙의 눈에는 지금 커피숍에 앉아 꽃다발을 안기는 저 할아버지보다, 자기 아내를 위해 돌멩이를 치우는 허리 굽은 이 할아버지가 훨씬 멋져 보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달팽이처럼 느리게 영숙이네 가게 앞을 지나가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던 영숙이 재욱의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건넨다.
“봤지? 여자들한텐 저게 훨씬 더 낭만적인 거야! 알아?"
“그래? 난 저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 꽤나 할머니 속을 썩였구나 생각했는데?”
재욱과 영숙은 그제야 배를 잡고 웃는다. 재욱과 영숙은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웃고 난 후 다시 정신없이 남겨진 일을 한다. 이제 두 사람은 더 이상 건너편 커피숍을 바라보지 않는다. 어느새 재욱은 다시 휘파람을 불며 구두 망치질을 하기 시작한다. 빠른 손놀림으로 구두를 닦던 영숙은 문득 깨닫는다. 어쩌면 영숙에게 가장 낭만적인 순간은 재욱과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일지도 모른다고.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