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듣는 낙엽 같은 봄날의 이야기...
올해도 어김없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문득, 그 봄날의 끔찍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벌써 1전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는 게 새삼 놀라울 뿐이다. 꽃은 어김없이 피고 지고, 세월은 어김없이 흘러가고 흘러온다. 그래서 인생은 죽을 것 같이 힘들어도 어떻게든 살아지는 법인가 보다. 다행인 것은 그렇게 가혹한 기억을 가진 내게 아직 벚꽃이 날리는 봄에 대한 동경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작년 봄이었다. 그 날도 벚꽃이 솜사탕처럼 피어나 온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야근을 해서 늦은 저녁도 먹지 못했지만, 나는 지하철 대신 벚꽃 축제가 열린다는 여의도로 향했다. 여의도 벚꽃 길은 벚꽃보다 사람들이 더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 벚꽃 구경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많은 인파 덕에 나 같이 혼자 온 사람들도 쉽게 감추어지니 말이다. 물론 그때 나는 그 사람과 교제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사이가 급격히 나빠졌었다. 그때의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날도 나는 며칠 째 전화도 없는 그 사람 때문에 심히 우울해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혼자 벚꽃 구경을 하러 간 것이다. 그리고 그 날밤, 나는 통속적인 드라마 한 장면처럼 내 남자친구의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내 친구를 보았다. 무대 특수효과처럼 흩날리는 벚꽃 아래 그 두 사람이 그렇게 다정하게 서 있었다. 꿈인가 생시인가 한참을 바라 보았다. 물론, 나와 눈이 마주친 그들도 나와 똑 같은 반응을 보였다. 이상한 것은 어떤 말도,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배경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일까? 그렇게 벚꽃이 날리듯 내 사랑도 날아가 버렸다.
한 동안은 내가 겪은 그 상황이 어떤 것인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 하지만, 주변엔 언제나 그런 사실을 꼭 집어 이야기해 주는 친절한 친구들이 있었다. 그렇게 친절한 친구들은 마치 그런 이야기를 해주러 태어난 사람처럼 그들과 나의 스캔들을 다시 보기 드라마처럼 재생하고 다녔다. 결국, 나는 그날 이후 친구들 모임에도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쉽게 말 해남자친구도, 친구도, 그리고 친구들 모임도 모두 잃어버린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 사건의 후유증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깊어지고 심해졌다. 자려고 누웠다가 벌떡벌떡 일어나는 일이 거의 매일 밤 일어났다. 아마도 어른들이 말하는 화병이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렇게 나는 지옥 같은 1년을 혼자서 묵묵히 견뎌냈다.
그렇게 다시 찾은 봄. 또다시 나는 벚꽃 길을 찾았다. 여전히 여의도 벚꽃 길은 벚꽃 보다 사람들이 더 많았다. 저 하늘 어딘가에서 사진을 찍는 다면, 이 수 많은 사람들도 모두 벚꽃처럼 보일 것 같기도 했다. 한 쌍이 아닌 한 몸이 되어 길을 걷는 연인들을 바라 보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니들도 지금은 한 몸인 줄 알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별 수 없이 벚꽃잎처럼 서로 흩어지리라! 그렇게 산뜻한 저주를 퍼부으며 나는 벚꽃 길을 걷고 또 걸었다. 그때였다. 그렇게 벚꽃보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그곳에서 나는 또 한번 진귀한 광경을 목격하고 얼어붙었다. 수 많은 인파가 강물처럼 움직이는 그곳에서 유난히 움직임이 없는 두 커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한 커플은 나의 전 남자친구와 낯선 여자, 그리고 또 한 커플은 나의 예전 친구와 또 다른 낯선 남자였다. 역시나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아니다. 그 어떤 영화가 이렇게 극적인 엔딩을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 나도 모르게 웃음 터져 나왔다. 겨우 이런 웃긴 장면 하나 보여 주려고 지난 봄부터 그들은 그렇게 몹쓸 짓을 했단 말인가? 바람에 날리는 꽃잎처럼 그들의 사랑도 내 사랑도 모두 부질없이 흩어지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