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의 어깨 위에도 벚꽃 같은 하얀 봄눈이 내려앉아 있었다.
선배가 돌아왔다!
처음에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너무 놀라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돌아왔다는 것도, 내게 전화를 먼저 했다는 것도 모두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선배와 만날 약속 장소와 시간뿐이었다.
선배와 만나기로 한 날은 이번 주 토요일 오후였다. 4월의 화창한 토요일 오후, 그렇게 나는 꿈에도 그리던 선배와 만나게 된 것이다. 만나기로한 시간은 오후 2시였는데, 새벽부터 내 몸과 마음은 너무 들떴고 뭔가 모르게 분주했다. 그러다 문득, 선배와의 약속 장소가 잠실 석촌호수 근처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지금쯤 석촌호수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원래 입으려던 갑갑한 옷을 벗어던지고 벚꽃과 어울리는 하늘하늘한 시폰 치마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벚꽃이 봄눈처럼 날리는 그 길을 선배와 함께 걷게 될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여전하네. 그동안 잘 지냈지?”
선배도 여전했다. 웃을 때마다 눈가에 보이던 귀여운 주름도, 다정한 목소리와 말투도 모두 예전 그대로였다. 하지만, 벌써 30분째 선배의 유학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선배가 하필이면 왜 내게 전화를 했는지가 무척 궁금해졌다. 혹시, 잊어버린 걸까? 4년 전 유학을 앞둔 선배에게 고해성사하듯 내뱉었던 나의 초라한 고백을 말이다. 아니다. 그는 원래 그렇게 무심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그런 선배가 지금 내 앞에 앉아 눈부시게 웃고 있었다. 나는 혹시 꿈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그의 맘 속 어딘가에 내가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착각하기도 했다.
“회사생활은 어떠니?”
선배가 드디어 내 안부를 물었다. 그런데 역시나 이상했다. 내 개인생활이 아니라 회사생활을 집요하게 물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내 대답이 조금 빈곤해지자, 다시 자신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결론적으로 선배의 말은 그렇게 힘들게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한국에 돌아와 일자리를 구하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선배가 넌지시 내게 물었다.
“혹시, 너희 회사에는 팀장급 디자이너가 필요하지 않니?”
그랬다. 선배는 내게 자신을 우리 회사에 추천해 줄 수 없냐고 묻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예상하지 못했던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바닥이 꺼질 것 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더 솔직히 말하면, 선배가 내 고백을 받고도 아무런 말없이 유학을 떠나 버렸을 때 보다 더 창피했다. 정말로 선배는 내가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기억은 하지만 자신의 취업이 더 간절했던 걸까? 이제와 아무래도 상관은 없었다. 그저 혼자 설렜던 내가 하시하고 미울 뿐이다. 나의 대답이 시원찮은 것을 깨달은 선배 역시 나처럼 자기 자신이 미웠던 모양이다. 선배는 어느새 아무말없이 애꿎은 담배만 물어뜯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안해요, 선배! 약속이 있어서 먼저 일어날게요. 오늘 반가웠어요.”
그러자 선배도 기다렸다는 듯 나를 따라 일어섰다. 다행히 그가 먼저 계산서를 잡았다. 그리고 성큼성큼 먼저 계산대로 걸어갔다. 나는 이제 그것만으로도 고마웠다. 내가 계산까지 해야 했다면, 나는 이 자리에서 정말 사라져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선배를 따라 걸어나오는 길...문득 나는 카페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벚꽃 잎이 봄눈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그러다 커피 값을 계산하고 있는 선배의 어깨위에도 벚꽃 같은 하얀 봄눈이 내려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아니, 벚꽃잎 만큼 희고 커다란 비듬이 살포시 내려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어쨌든 봄날은 봄날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