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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경아 Nov 10. 2015

[노래소설] 성시경의 "당신은 참..."

어쩌면 깨어날 수밖에 없는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똑 똑 똑!”

“네!”

문을 빼꼼히 열었다. 부서지는 햇살 아래 그가 앉아 있었다. 나를 보고 살짝 미소 짓는다. 나도 모르게 또 현기증이 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무사히 서류를 전달한다. 그의 팔이 움직일 때마다 시원한 민트 향이 코를 자극한다. 그때, 그가 볼펜을 떨어뜨린다. 순간, 나도 모르게 팔을 뻗어 볼펜을 줍는다. 나의 동작은 번개보다 빠르다.


“고마워요.”


그에게 볼펜을 건네다가 그의 손끝이 내 손에 와 닿는다. 감전이 된 듯 한 기분이라고 하면 과장일까? 그의 부드럽고 친절한 손이 내 손에 닿았을 때 그 짧은 순간이 내겐 잊히지 않는 또 하나의 추억이 된다. 아득한 생각에 빠져 있는 내게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것저것 물어 온다. 나는 이런 내 마음을 들킬까 두려워 엄한 볼펜만 쳐다 보며 대답만 한다.


“어제 회식했는데……잘 들어 갔어요?”

“네. 그럼요.”

“사실, 깜짝 놀랐어요. 어제 회식자리에서 한 말인데……벌써 정리해서 가져다 줘서……”

“아, 네! 본부장님이 서둘러 달라고 하신 것 같아서……”

“고마워요. 역시 이 과장님밖에 없네. 수고했어요!”


천근보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본부장님 사무실을 나온다. 날이 갈수록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처음엔 그저 생활의 활력소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본부장님은 드라마에 나오는 멋진 남자들만큼 잘 생기진 않았지만, 실력 하나로 젊은 나이에 본부장까지 된 사람이었다. 나보다 한 살 어린 나이에 벌써 본부장이라는 직책을 맡았고, 아직 싱글이라 회사 여직원들에게 그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더군다나 오래 사귄 여자친구도 있어서 여자들의 가슴을 더 안타깝게 만들었다. 그런 본부장님을 나 역시 그저 연예인 좋아하듯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혼자 좋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새로 꾸려진 프로젝트로 그의 방에 단독으로 들어갈 일이 많아지면서 나의 마음은 넘어야 할 마음의 선을 자주 넘게 되었다. 본부장님은 수준 높은 매너와 유머감각까지 겸비한 남자였다. 그 무엇보다 그가 감동적인 이유는,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일지라도 인간 대 인간으로 존중하고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여자로서 한 회사에서 과장까지 오른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때로는 성희롱에 맞먹는 상사의 농담에도 무덤덤해질 줄 알아야 하고, 여자라서 어쩔 수 없다는 비아냥도 묵묵히 받아내야만 한다. 이를 악물고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면, 칭찬보다 독한 여자란 소리를 들어야 했다. 내가 노력해서 얻은 이 지위는 능력이라기보다 독기였고, 시집 못 간 노처녀의 발악쯤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부장은 달랐다. 나의 능력을 인정해 주고, 내 의견을 충분히 존중해 주었다. 그런 그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어려운 일이었다.

어느새 나는 본부장과 잘 맞는 동료 그 이상 가까워졌다고 느꼈다. 물론, 내 혼자만의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함께 회의를 할 시간도 많았고, 무엇보다 비슷한 나이 또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와 가까워 지면 가까워질수록 위험한 나의 짝사랑도 깊어져 갔다. 함께 보낸 시간 속에서 우연히 스쳤던 많은 손길과 눈길들에 나 혼자서 큰 의미부여를 하기도 했다. 유난히 따듯하고 부드러웠던 그의 손길에 분명 다른 의미가 있을 거라 애써 우겨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분명하게 선을 지켰고 그 선을 내게 확실히 보여주기도 했다. 그런 그의 행동을 보며 나는 한편으로는 서운했지만, 또 한편으론 고맙기도 했다. 여자친구가 있는 남자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그가 좋았고, 존경스러웠다. 결국, 나는 그와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다짐했다. 하지만, 나의 해바라기 같은 사랑은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점점 더 깊어졌다. 어쩌면 깨어날 수밖에 없는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그 꿈에서 깨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그렇게 그의 얼굴 한번 더 보겠다고 밤을 꼴딱 새워 일을 했던 것이다. 그의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눴으니 오늘은 그것으로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피곤하지만 달콤한 영혼을 달래며 휴게실로 갔다. 진한 블랙커피 한잔을 뽑고 있는데, 휴게실구석에서 떠드는 여직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제 본부장 장난 아니었다며?”

“어제 3차로 남은 사람들만 목격했다는데, 총무과 막내가 본부장한테 간택되었다던데?”

“진짜? 와……정말 본부장은 영계 킬러구나?”

“쉿! 저기 마녀 왔어……”


순간,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나는 마치 그 이야기를 못 들었다는 듯이 여유 있는 걸음걸이로 휴게실을 빠져 나오려고 애썼다. 휴게실을 거의 다 빠져 나왔다고 느꼈을 때, 조용하게 나의 심장을 찌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녀가 본부장이랑 친하잖아…….”

“그럼 뭐하냐? 본부장은 영계들만 좋아하는데……풉!”


터지는 웃음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으며 나는 아무도 모르게 화장실로 숨어들었다. 좌변기 뚜껑을 닫고 앉았다.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계속 흘렀다.  그렇게 나는 깨고 싶지 않은 꿈을 깨어 버린 것이다. 슬펐다. 아니 그 보다 두려웠다. 이제 다시는 그런 꿈조차 꿀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끝.


>>성시경의 "당신은 참" 노래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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