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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경아 Sep 13. 2016

[노래 소설] 김광석의 "말하지 못한 내 사랑"

그녀는 떠났고, 나는 여기 남았다. 빛바랜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나는 당신이 알고 있는 스토커처럼 그렇게 흉악한 사람은 아니다. 왜냐면, 나는 내 꼬락서니와 주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그녀를 좋아하지만, 절대 어떤 선을 넘거나 귀찮게 할 생각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나는 더도 덜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이렇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그녀를 지켜보는 것만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그뿐이다. 


 그녀는 내가 살고 있는 다세대 주택 바로 옆 건물, 같은 층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옆 건물이라고는 하지만, 내 방 창문을 열고 힘껏 팔을 뻗으면 그녀의 창문이 닿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깝게 붙어 있어 한 집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았다. 덕분에 내 방은 한낮에도 햇빛이 잘 들지 않아 항상 어두컴컴해서 겨울엔 춥고 여름엔 습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 방이 3층이라 창문을 열고 고개를 빼면 작은 쪽 하늘 정도는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다행인 것은 그녀가 나와 아주 가깝게 있다는 것이다. 내 직업은 하루 종일 내 방 책상에 앉아 있는 3류 웹툰 작가였다. 그래서 옆집이 아니라 옆방에 살고 있는 것 같은 그녀의 일상을 아주 자연스럽게 지켜볼 수 있었다. 특히, 그녀의 방으로 이어져 있는 길고 위태로운 철제 계단은 발걸음 소리에 예민해서 그녀가 외출을 하는지 들어오는지 보지 않고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덕분에 나는 그녀에 대해 아주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우선, 그녀는 집에서 약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는 직장에 다니는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면, 항상 아침 7시 20분에 집을 나서기 때문이다. 아침에 듣는 그녀의 발걸음은 동동거리는 아이의 발걸음처럼 발랄하고 귀여웠다. 또한, 평균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항상 출근을 했다가 다시 되돌아왔다. 아마도 핸드폰이나 지갑을 집에 자주 두고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날엔 특히 그녀의 분주한 발걸음과 함께 가뿐 숨소리도 들렸는데, 그때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발그스레해진 두 볼이 보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녀가 하루 일과가 시작되면, 나는 바로 잠이 든다. 그녀의 출근 발걸음이 내게 무엇보다 듣기 좋은 자장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저녁 8시. 그녀의 평균 퇴근 시간이다. 아침에 비해 그녀의 발걸음은 젖은 솜처럼 묵직하고 무겁다. 오후 2~3시쯤 겨우 일어난 나는 아침인지 저녁인지 모를 밥을 먹고 조금 빈둥거리다가 그녀의 퇴근 발걸음 소리를 듣게 된다.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책상 앞에 앉아 작업을 시작한다. 그녀의 방안에 불이 켜지고 들리는 TV 소리, 그리고 간간히 들리는 청소기 소리. 세탁기 소리를 들으며 작업을 해야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어느새 그녀가 사는 집에도, 내 방안에도 생기가 넘친다. 그렇게 행복하고 생기가 넘치는 몇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녀의 방에 불이 꺼진다. 나는 숨소리를 죽이고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녀의 단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가 지나고 나면 나는 배고픔을 느낀다. 혹시나 그녀의 잠을 다시 깨우게 될까 나는 조심조심 렌즈에 불을 켠다. 그리고 라면을 끓인다. 깊은 밤에는 작은 소리도 아주 크게 들린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공주님의 꿈나라를 지키기 위해 불침번을 서고 있는 꼬마 병정처럼 그렇게 온 밤을 하얗게 새운다. 


 토요일 오후, 손님이 찾아왔다. 물론, 우리 집이 아닌 그녀의 집이다. 오전부터 그녀가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맛있는 냄새가 내 방 창문까지 두드렸다. 덕분에 나는 좀처럼 잠이 들지 않았다. 낯선 3명의 발걸음 소리와 함께 맥주인지 와인인지 알 수 없는 술병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묵직한 비닐봉지 소리도 함께 들렸다. 맛있는 음식 냄새에 허기를 느낀 나는 다시 일어나 물을 끓였다. 그리고 끓는 냄비 속에 냉동 만두 반 봉지를 투하했다. 만두가 거의 다 익어 갈 무렵, 나는 그녀의 명랑하고 청량한 웃음소리를 들었다. 신기했다.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녀와 친구들의 웃음은 계속되었고, 나는 그녀의 웃음소리를 더 크게 듣기 위해 불을 끄고 창문을 활짝 열어 두었다.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도 빙그레 웃었다. 눈을 감고 있으니 마치 내가 그녀의 친구가 된 기분도 들었다. 문득, 그녀와 같은 방에 앉아 수다를 떠는 그 친구들이 부러워졌다. 하지만, 나는 마치 저주를 받아 벽 속에 갇힌 요정처럼 벽에 기대 그녀의 웃음소리를 밤새 듣고 있을 뿐이다.  


 쿵쾅거리던 심장은 지금이라도 펑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왜냐면 지금 그녀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라면과 담배를 사러 동네 편의점에 나온 길이었다. 생수 몇 병을 사 가지고 나오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순간 인사를 할 뻔했다. 다행히, 말문이 막혀서 나는 인사를 할 수가 없었다. 눈이 마주친 0.5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 나는 수 만 가지 생각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어느새 생수 병으로 가득 찬 무거운 비닐봉지를 들고 내 옆을 지나쳤다. 나는 당장 달려가 그녀의 무거운 비닐봉지를 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 떡 진 새집 머리와 더부룩한 수염, 그리고 트레이닝 바지는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편의점에서, 아니 내게서 멀어지는 그녀를 언제나처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오늘 그녀가 이사를 간다. 한 달 전, 부동산 사람들이 그녀의 집을 들락거릴 때부터 짐작을 했던 일이다. 하지만, 막상 그녀가 이사 가는 날이 되자 마음이 이상하게 담담했다.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지난 2년 동안 그녀는 나의 유일한 낙이었고, 위안이었다. 아마도 그녀를 몰래 지켜보면서 나는 그녀와 어느 정도 삶을 공유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녀에게 아무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매일 아침 그녀의 발걸음 소리를 듣기 위해 반쯤 열려 있던 창문을 조용히 닫는다. 예민한 철제 계단을 오르내리는 인부들의 투박한 발걸음 소리가 내 가슴을 짓밟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알까? 내 방 창문은 언제나 그녀를 향해 열려 있었다는 것을. 




 그녀가 떠난 후, 신혼부부가 새로 이사를 왔다. 별도 달도 잠들었을 것 같은 깊은 밤, 나는 처음으로 TV를 크게 틀고 창문도 활짝 열었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행동이었지만, 내게는 일종의 일탈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그동안은 그녀가 밤잠을 설칠까 두려워 되도록 소음을 내지 않으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 평소 안 하던 행동을 하는 것은 그녀가 없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새로 이사 온 신혼부부의 첫날밤이 생각보다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문득, 간간히 그녀의 방에서 들리던 음악소리가 생각나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창피한 마음에 눈물을 훔치다가 문이 열린 창틈 옆에 하얗고 네모난 무엇인가가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뭐지? 손바닥보다 훨씬 작은 폴라로이드 사진이었다.  

<2015/10  하늘을 바라보다.> 

폴라로이드 사진 아래 하얀 부분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사진 속에는 그녀의 방에서 바라본 조각난 하늘과 함께 내방 창문이 살짝 보였다. 그제야 나는 기억이 났다. 그녀가 한창 폴라로이드 사진기에 심취해 있을 때였다. 날씨 좋은 어느 휴일, 나는 그녀가 창문을 열고 사진을 찍는 걸 보고 깜짝 놀라 창문 밑에 숨어 버렸다. 바로 그날 그녀가 이 사진을 찍은 것이다. 아마도 이 사진은 그녀 책상 어딘가에 붙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사진이 지금 왜 내 창틈에 끼어 있는 걸까? 오만 가지 생각들이 머리를 맴돌았다. 하지만, 그래도 달라질 것은 없다. 그녀는 떠났고, 나는 여기 남았다. 빛바랜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그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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