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수
간만에 현대백화점을 갔다. 간만에라는 수식어는 좀 웃긴데가 있다. 나는 현대백화점을 좋아하지만 좋아하지 않는다. 현대백화점의 과일들은 명문대 학생모델 같다. 신선한 과일들 중에서도 모양이 이쁘고 건강한 녀석들만 골라서 놓는 것이 분명하다. 과수원에서 만난 녀석들은 그렇지만도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맛이 없는가? 하면 맛에 대한 선별 기준도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집으로 모셔온 녀석들의 평균 당도는 밭에서의 그것보다 높은 경향이 있다. 너무 선발된 것들을 들었다 놓았다 해가면서 가려 뽑아 집으로 들고 가는 행위는 불편하다. 국가 전체의 인재양성에 투자하기보다 과도한 경쟁상태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는 자들 중 몇 명만 건져가는 대기업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이런 이성적 인지의 위화감이 불호의 원인은 아니다. 나도 동물인지라 맛나고, 이쁘고, 신선한 것에 본능적으로 끌린다. 내 불호의 원천은 스스로 자초한 가난한 삶에서 기원하는데, 본능적인 이끌림에 따라서 나간 손을 가로막는 것이 보통 가격표이기 때문이다. 상상하는 비싼 가격에서 때로는 수 배 이상 차이 나는 경우가 있는데 흠칫.. 찔끔... 하고 손을 내려버리고 마는 것이다.
약간 무리를 하면 못 살것도 없긴 하지만,, 카드값 갚는 날의 내가 또 일기장에 쓸 것 아닌가? "한 번의 과일 값이 전기세 보다도 많이 나왔다."라고. 순간의 과일 사치가 남은 한 달의 삶을 압박 할 수 있다. 하여 꼭 뭐 예쁘고 맛난게 다인가?! 꼭 어디 온실속에 자란 놈들 모아 놓은 것같이 생겨가지고는,, 하고 비아냥 대며 가난한 마음을 숨기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부자들은 저 가격에도 먹는단 말인가?!" 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여하간 정신건강을 위해 자주 방문하지 않긴 하지만, 극상의 신선함을 유통하는 세계의 발전사를 돌아보거나, 가성비를 내는 것 만으로는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새로운 발상물이 보고 싶어질 때는 꼭 꼭 방문하는 편이다. 신촌의 하부에서 드물게 시간이 남을 때와 한 달 이상 현백 방문을 하지 않은의 두 조건이 만족 되면 어김없이 현대 백화점을 찾는다.
그러니 나의 모든 방문은 드문 방문일 수밖에 없는데 "간만에 현대백화점을 갔다"고 쓰는 것은 몹시도 보는 사람들을 의식한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시나브로 썼다는 점이 놀라울 따름이다.
여기부터가 오늘의 현대백화점에 대한 진짜 감상이다. 슬슬 빠져나오려던 차에 실수로 라면 코너로 들어 섰다. 문득 , 공산품인 라면을 현백 가격으로 사는 건 하수지! 하는 생각으로 코너를 도니 신상 쌀국수가 60퍼센트나 할인 중이다. 빛과 같은 속도로 뻗어나간 손. 왜일까? 분명 내 평소 가격 분석 결과를 반영한 행동인데, 상당히 하수가 된 것 같은 기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