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락한 과학자의 일상
오래간만에 재밌는 수학적 상상이 떠올랐다. 골드바흐는 오랫동안 나와 함께한, 일종의 애완 문제다. 새로운 개념을 배울 때마다 먹이로 던져주고 같이 놀곤 한다. 요즘엔 읽는 글들이 수학이나 과학에서 벗어난지 오래라 놀아준 기억이 아득하지만.
겉보기엔 이 문제, 꽤 귀여워 보인다. 4 이상의 모든 짝수는 두 개의 소수의 합으로 표현 할 수 있는가? 질문은 단순하고, 개념은 익숙하다. 덧셈과 소수. 누구도 이 녀석이 아프게 무는 모습을 상상하지 않는다. 실상은 다르지만... 나의 경우엔 중학교 1학년 즈음 처음 만났으니, 햇수로는 25년. 징글하게도 함께했다. 수학 푸는 마음의 손, 팔, 다리엔 녀석이 남긴 이빨 자국이 한가득이다.
야간 자율 학습 시간, 빈 실험실을 지키며 러셀 선생님의 철학 입문서를 읽던 중. "문제의 대다수는 정의하는 방식으로부터 비롯되기에, 제대로 정의된다면 문제되는 부분이 없을 수 있다"는 글이 맘에 걸렸다. 타격을 받았다. 살면서 겪은 많은 문제들이, 내가 어떤 관점으로 바라 보는가에 따라 달라졌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글에 충격 받을 때 늘 그렇듯, 일어나서 안절부절 이리갔다 저리갔다하며 흥분과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을 때, 골드바흐 그 녀석이 생각났다.
우리는 보통 자연수를 덧셈으로 정의한다. 1이라는 수에서 출발하여, 그 1을 반복해 더하며 자연수가 자라난다. 차이가 1씩 나는 수들의 무한한 나열. 하지만 문득, 우리가 덧셈의 관념으로 소수 문제를 풀고 있어서 이 문제가 풀리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반대로, 소수의 관점에서 자연수를 정의하면 어떨까. 덧셈이 아닌 소수적 구조로 자연수를 바라보는 방법.
예컨대, 소수들을 1번 집합이라 하자. 그다음, 소수 두 개를 곱해서 나오는 수들을 2번 집합에 넣는다. 그다음은 소수 세 개를 곱한 수들, 3번 집합. 이렇게 나아가면, 소수들의 곱의 수를 기준으로 자연수를 집합화할 수 있다. 각 집합은 서로 겹치지 않으며, 전체를 합치면 자연수의 전체가 된다. 어떤 수도 분해된 소인수의 갯수는 1개 이상이어야 하니까.
정리해놓고 나니 그럴듯해 보인다. 소수로 자연수를 정의해 놓았으니 짝수와의 관계성도 소수중심의 연산을 활용해서 얻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뒤따라 안겨드는 몇 가지 새로운 생각들. 들뜬다. 무언가를 스스로 떠올린다는 건 언제나 마음을 뛰게 한다. 이미 누군가 해놓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다. 십 수년의 들뜸과 삽질을 반복해온 경험에 비추어 보면 확실히 그럴테다. 하지만 당장의 흥분감은 그런 사실과는 별개다. 순간의 번뜩임이 지나간 즐거운 여파와, 남의 것을 보지 않고 해냈다는 해결의 기쁨은 온전히 나의 것이니까. 또 이쪽 저쪽으로 경박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들떠 하다 팬을 잡는다. 노트를 펼치고, 기록을 남기고 풀어나간다.
그래서 결론이 어떻게 되었냐고? 여전히 진행중이다. 2000 이하의 짝수를 만들 수 있는 모든 소수의 쌍을 쓰고 규칙을 구해 보려고 했을 때나, 알고리즘으로 소수쌍 분포를 분석해서 해결해보려고 했던 때보다는 훨씬 상황이 좋고, 또 나쁘다.
완벽하게 아니란 결론을 찾을 순 없었고, 자꾸 새로운 생각들이 나타난다. 이미 다른 이들이 연구해 놓은 내용이 많아 공부해야 할 내용이 한없이 많아졌다. 희망은 남았지만, 그 분야를 업으로 삼고 있지 않은 이상 도저히 닿을 수 없을 것 같이 높은 산을 마주한 감각. 생업과 그 일상들에 눌려, 이전과 같은 무모한 패기도 몇 일을 작업에 착수 할 시간도 잃어버린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짬을 내어 이 문제를 다시 마주하고 있으면, 푸른 잔상이 심장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직,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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