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굴, 멈칫. 절룩, 데굴 멈칫. 세상 어떤 바퀴보다도 느리게 나아가는 바퀴. 걷는다는 건 원래 두 발을 바꿔 딛느라 주기가 생기는 운동이지만, 새벽 1시. 폐지와 플라스틱, 캔을 주우러 다니는 할머니의 손수레는 차원이 다른 시간의 압축을 딛고 굴절된다. 고르지 않은 움직임. 보통 걸음의 미세하던 주기성이 과장되어 휘청인다.
서울의 오지랖은 섬 사람 특유의 온정을 시샘하여 부르는 이름. 기묘하게 삐걱대는 비선형의 마찰음이 귀를 통해 사선으로 폐와 심장에 닿는다. 철판을 들어 올리느라 무거워진 다리를 더 바닥에 끌리게, 멈칫 멈칫 거리게 한다. 각자의 삶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납득이 되지 못하고. 무언가 찾아야 할 것 같은데 정작 찾은 것 없이. 마음만 다리를 저는 시간들.
불편한 마음을 가지는 것까지도 한 편으론 동정심을 가장한 위선 혹은 우월감의 다른 표시라는 비난도 들어 봤지만, 어쩌라고. 그땐 반박을 온전히 못했지만, 그런 마음이 아니었다. 그래도 백 키로가 넘는 쇠덩이를 들어 올리는 내가 고철을 끄는게 인간적이다. 자본주의적 개인주의의 틀 안에서는 그다지 해법이 보이지 않지만. 눈 앞에서 벌어지는 불편함을 넘어서는 균열. 경쟁과 분배가 공평하게 축적되지 못하여 생기는 왜곡을 오지랖은 정확히 읽고 있었다.
그 추락하듯 날카로운 자본주의. 그곳으로 환원되는 게 너무 당연한 일처럼 횡행 한데도, 결국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묶인 몸으로 살고 있더라도. 마음까지 묶여 모든 자연발생하는 감정을 멸종 시킬 필요가 있을까. 그것이야 말로 지적 방관이다. 무능이다. 너는 현명한 척, 제가 가장 똑똑하다는 척 말할 자격이 없다. 그저 가장 마음 편한 대로 지껄였을 뿐이야. 가장 자기 주장이 희석된 형태로, 세상의 논리 뒤에 숨어서.
삶과 세상이 돌아 가는 방식이 어떤 것이기에, 청년은 하루를 살고도 남은 힘을 철판에다 쏟아 붇는 동안 노인은 고철과 폐지를 줍고 다니게 하는 것일까. 그 대답은 분명 내가 할머니의 카트를 대신 미는 것으로는 닿을 수 없는 위치에 있는 것이었지만, 이 카트를 밀고 나가기로. 이 마음을 질질 끌기로 다짐했다. 언젠가 마주치는 날에 자본주의 그 잔혹한 놈의 뺨아리를 한대 날려주기 위해. 철판을 밀어 올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