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아직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한 여름의 온도, 35.4. 체온과 기온의 차이가, 거의 없다. 그럼 36.5를 잘 유지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은 찰나에 인간을 가둔다. 시간의 흐름속을 사는 인간은 자연스레 운동한다. 심장이 뛰고, 팔 다리가 움직이고, 뇌속으로 전류들이 흐른다. 그렇게 발생한 열들을 주변으로 흩뿌려야 유지되는 것이 36.5 인 것이지. 가만히 36.5를 유지하고 있는 그런 살아감은 없다.
죽어있어 변화라곤 없을 것 같은 물건들도, 질감을 이루는 단위들과 물성을 만드는 군집이 상호작용 하여 자기만의 현상과 흐름을 만든다. 빠른 물의 흡수를 위해 생긴 실융털이, 태양 빛으로 수분을 증발시키기도 쉬운 탓에 물 한 잔으로 방 온도를 낮추는 것 같이.
36.5를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흘러야 하듯, 삶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현대는 모던한 시간[1]은 그래야 한다는 듯, 모든 것을 나누고 쪼개어 버린다. 그러다 인간성 마저 자본 앞에 분절된 삶. 그런 삶에 익숙해지면, 찰나와 찰나로 너와 나의 온전한 개체로 나누어 보는 눈만 예리해진다.
공동 업무에서도, 가족 관계에서도 마찬가지. 함께함보다 이득을 따지고, 가사와 돈벌이를 서로 떠넘기며 금 긋는 사이. 공통의 정서, 공동의 공간, 심리적 안정감 같은 것은 설 곳이 없다.
그 비좁아진 틈엔 새 생명이 차오를 곳이 없다는 것. 돈이 많아야 겨우 비집고 태어난다는 사실은 현상의 당위성이 만든 철벽을 두르고. 숫자를 벡터로 확장하기도 힘들어, 인격이란 고유체를 텐서[2]도 아닌 숫자 몇 개로 고정시킨 이론을 신앙처럼 믿으며. 그 좁은 이해 안에 인간이 담겨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게 우습지도 않은지. 서 푼도 담기지 못한 마음이 이곳에서 터져 나가는 게 무어 놀라운 일이라고. 대안도 없이 요란 떠는 뉴스와 신문을 보고 있자면, 씁쓸한 웃음이 날 뿐이다.
[1]: viva 찰리 채플린!
[2]: 벡터의 확장. 거리와 방향을 의미하는 것보다 다채롭고 다양한 정보를 내포 할 수 있으나, 태생적인 이해하기 어려움을 가지고 있어 물리학 전공자들에게도 이해가 쉽지 않은 존재로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