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니,

어찌 어여쁘지 않으랴

by MONAD

나는 사실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나는 그냥 내가 좋은 걸 하기로 했다.


취미로 개인이 운영하는 미술 수업을 친구와 함께 들을까 궁리를 했었는데 사람이 부족해서 결국 수업이 사라졌다. 1인당 수업료가 적으니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수업료가 많으면 또 내가 그다지 흥미가 없다.


내게 들렀던 친구 B가 그 소식을 퍽 아쉬워하며 돌아갔다. 친구 따라 강남 가려다 길이 막혀 못 가는 모습이 된 것 같아 나는 속으로 쬐끔 좋아하며 겉으로는 또 조금 미안했다. 친구는 그 수업을 일부러 찾아보고 나도 설득하고 애를 썼는데 그리되어서 사실은 조금 더 미안해해야 할 것만 같았다. 더 찾아보자는 말에 그냥 말없이 웃고 말았다. '어쩌니, 나는 이보다 더 멀면 못 가'라고 말하면서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불편을 나누지 못했던 마음이 편해지니 이상하게 몸도 나긋나긋 편해졌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일단 고양이를 먼저 그려보려고 스케치북만 구입했었다. 사실 오늘은 붓과 물감도 사려고 했었다. 바지에 흘린 커피 얼룩덕분에 내일로 미룬 건 아마 운명이었나보다.


때때로 살다 보면 친구에게 억지로 설득도 되고 그냥 할 만하면 따라가 주리라 싶은 일이 생겨난다. 그럼에도 마음은 어딘가 불편하다. 그 불편한 마음은 나눌 수도 없는 내 마음이다. 불편이 꼭 나쁜 건 아니다. 불편한 일을 하다가 가지고 있던 편협한 사고방식이 넓게 변하는 경험을 하기도 하니 나는 불편한 일을 일부러 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주어질 때 무작정 피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냥 마음이 불편한 건 그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성질일 뿐이다.


햇살이 고운 오후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이것 저것 정리를 한 후에 읽던 책을 챙겼다.


지난 번 할인 행사때 사 온 다크 로스트상태의 커피를 처음 열어서 정성스럽게 내리고, 맛있는 바닐라 라떼를 만들어본다. 트레이더죠에 새로운 바닐라빈상품이 나왔다고 하나 주고 간 친구 B덕분에 새로운 라떼의 맛을 익혔다. 바닐라빈 페이스트인데 생각보다 페이스트치곤 묽다. 비주얼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이걸 우유에 조금 섞으면 맛이 고급스럽게 변한다. 퍽 만족스러운 상품인데 나는 이걸 사러 일부러 먼 거리의 트레이더죠에 가진 않을 것이다. 그걸 잘 아는 친구가 내게 일부러 주고 간 것이라 무척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중에 필요한 게 많아져서 그곳에 들렀을 때 이게 여전히 존재한다면 몇 개 넉넉히 사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상당히 큰 컵에 고소한 라떼를 하나 가득 담고 바로 뒤뜰로 나갔다.

적어도 5시까지는 아무 방해 없이 자유롭다.


지금 책을 여러 권 번갈아가면서 읽고 있는데 그중 하나는 로맨스물이다.

그 내용 중 결혼을 원하는 여자와 결혼이 싫은 두 사람이야기가 있다.


그 둘은 사랑을 하지만 의견이 달라서 헤어졌다.

나는 단지 그 두 사람 이야기가 궁금해서 나머지 재미없는 부분들을 참아가며 열심히 읽고 있다.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결혼을 싫다 해서 그 여자는 옛날에 만났던 옛날 남자 친구를 다시 만난다. 그 성실했던 남친은 여전히 그녀를 생각하고 있고 가정을 갖길 원해서 멋진 집도 사놓았다.


그러나 마음에 여전히 다른 남자를 담고 있는 그 여자는 그 집만 마음에 든다.


이 스토리는 두 개의 라디오 방송과 엮여 있다.

하나는 오전방송의 여자진행자, 하나는 남성진행자가 진행하는 한밤의 토크쇼다.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청중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상담을 해주는 역할을 하는데 이미 서로를 알고 있고, 젊은 시절 한때 서로 사귀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던 연인이었다.


영어로 읽는 이런 소설의 장점은 19금 묘사에도 얼굴이 덜 붉어진다는 것이다.


31장까지 있는 책인데 지금 막 25장을 넘겼다. 읽을수록 뭔가 괴리감이 있는데 그게 뭔지는 다 읽고 나면 알 것 같다. 책안쪽은 낡아서 책 냄새가 나기 때문에 볕 좋은 한낮에만 밖에서 읽고 있어서 속도가 좀 느리다.


그럼에도 그 책냄새가 상당히 심해서 실내에서는 읽고 싶지가 않다.


얼마나 심하길래 그러냐고 묻는 분이 있다면, 오래된 책의 먼지 냄새가 주는 불쾌감을 어떻게 표현할지는 모르겠으나 그건 마치 곰팡이가 핀 유리병 안을 청소하기 위해 유리병을 열었을 때 느끼는 불쾌감과 비슷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지금 그 책을 읽을 때는 나는 햇빛에 페이지마다 두 번씩 공기 중으로 무언가를 털어내듯 냄새를 털고 난 뒤에 책을 읽어야 한다. 헌 책을 구입할 때도 나는 냄새나는 책은 구입하지 않는데 이 책은 겉표지가 너무 새 모습이라 나는 냄새확인은 미처 생각도 못했었다. 겉이 새것이면 안도 새것이 되어야 옳을 텐데 그렇지가 않았다. 책 먼지가 아니라 책 냄새를 털다니 생각해 보니 흥미롭다. 아마 한 곳에 펼쳐지지도 않은 상태로 오래오래 머물러 있었나 보다.


그래서 아무래도 더 노력을 해야 하니 이 책을 다 읽으려면 아무래도 이틀은 더 필요할 것 같다.


오늘 햇빛은 비둘기 깃털빛처럼 무채색의 명도에 붉은빛은 사라져서 고즈넉이 아름답고 바람은 때때로 불어와서 책 읽기엔 퍽 좋았다.


예부터 독서의 계절이 가을인 까닭이 날씨, 바로 여기에 있구나 싶다.


갑자기 어릴 적 부터 오랫동안 살았던 동네의 산책길이 생각나서 한참동안 라뗴만 마셨다.

문득 문득 생각해보면 마음에선 늘 그립다.

고향이란 그런 곳이다.


가을 날도 그런 날이다.

가을 날이 어찌 어여쁘지 않으랴.






작가의 이전글하필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