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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즈 Mar 29. 2023

진정한 용서란 [용서에 대해서]

완벽한 사과는 없다

 사과든 뭐든 듣고 싶지 않다고 했다. 사과를 하고 정리하녀는 건 내 욕심이었다. (중략) 용서는 약속이 아니다. 결과가 아니다. 기나긴 과정이다. 우리는 그 긴 과정의 문턱을 겨우 넘었을 뿐이었다. (중략) 빛을 등지면 그림자는 앞으로 진다. 빛을 향해 돌아서면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 기억들은 그림자처럼, 끝까지 우리의 발끝에 달라붙어 있을 것이다.
- <완벽한 사과는 없다> 본문中 -


 최근 학폭(학교폭력)이 큰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고 <더 글로리> 넷플릭스 드라마가 화가 되면서 '처벌'과 '용서'에 대해 사람들이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나 역시도 <더 글로리>를 흥미진진하게 시청하였고 피해자의 입장에 서서 사회부조리를 바라보고 통쾌함과 대리만족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다만 폭력을 폭력으로 대갚음이 과연 옳은 일일까 가는 생각이 들었지만, 드라마이니까. 이런 드라마로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인간의 욕망을 대리해소시켜 주는 것도 한편으론 건강한 국민의 정서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을 하던 중 만나게 된 책 <완벽한 사과는 없다>. 책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학교폭력에 관한 이야기이고, 여기엔 가해자는 극의 중심에 직접적으로 있진 않다. 그 사건을 일종에 방관했던 친구들이 중심이 되어 피해자와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용서'라는 주제를 풀어나가고 있다. 그러니 사실상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를 하는 장면은 없다. 그리고 그 가해자의 행방을 알 수 도 없다. 아마 작가는 오로지 방관자와 피해자 중심의 서사를 그려내고 싶었나 보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 피해자의 치유와 회복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을 살펴보면 오로지 피해자의 몫으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은 매우 더디고 느리다. 평생 회복이 가능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처음의 백지상태인 '나'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고의 시간 끝에 다른 행복한 기억과 관계들로 잘못된 그림들이 덧칠해져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그려가고 있는 것은 아닐지.


잘못된 걸 솎아 내는 건 쉽다. 잘되도록 만드는 건 너무 어렵다. 적절한 타이밍에 물과 비료를 주고, 꽃을 따거나 가지치기를 하고, 나머지는 운에 맡겨야 하고.
- <완벽한 사과는 없다> 본문中 -


 그럼 용서란 어떻게 구하고 해야 하는 것일까. 소설 속에서도 이야기하듯이 잘못을 지적하고 인정하는 것은 그동안의 고통의 시간에 비하면 굉장히 짧고 단순할 수 있다. 하지만 단지 '미안'이라는 말로 용서를 구하는 것은 한없이 부족하다. 다시 그 아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만드는 건 너무 어렵다. 무조건적인 사과는 있지만 무조건적인 용서는 없다. 전적으로 피해자의 편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피해자의 의사에 따라 가해자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그간 피해자의 인권과 의사를 철저하게 무시한 피나는 대가이다. 사실 폭력이라는 것이 학교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닐 테고 특정 나이에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학교라는 보호와 교육의 현장에서 사회적 약자인 청소년들에게 회복되거나 힘쓸 수 없을 만큼 입히는 치명적인 폭력이기에 우리 어른들은 사회는 책임을 연대하며 통감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모두가 방관자인 셈이다.


하나를 잘못했으면 다 감수해야 한다는 듯이. 죽을죄를 지었으니 사소한 건 따지지 말라는 듯이. 한번 검게 물들었으니 조금 덜 더러워지려 애쓸 필요조차 없다는 듯이.
- <완벽한 사과는 없다> 본문中 -


 학교폭력은 어른들과 사회적 구조적 제도적으로 개선이 되어야 할 분명한 문제이다. 가볍게 넘길 문제는 없다. 괜찮을 것이라고 섣불리 판단을 내려서도 안되며 '어쩔 수 없었다'라는 변명도 허용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시는 이런 일들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작은 힘이라도 보태어 관심을 가지고 애정을 쏟는 일이다. 글을 쓰는 와중에도 혹시나 나의 글이 또 하나의 생채기를 내는 일이 아닐까 굉장히 조심스럽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도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건 또 다른 회피라 생각이 들어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내본다. 차라리 최선을 다해 나의 위로를 표하고 행동해서 부족한 부분은 질책을 받는다면 다시 깨닫고 노력하는 편을 선택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선의의 마음과 피해자를 이해하고자 하는 관심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우리 어른들이 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인간은 이성적, 사회적, 정치적, 유희적 존재•••  그리고 윤리적 존재. '보편적으로 타당한 선을 파악하는 능력과 자신중심성을 벗어나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 (중략) 답이 없으니까 매번 생각하고 고민해야 한다는 걸 알기 위해서 배우는 거지. 사람의 일이란 게 기계적으로 답이 나오는 게 아니니까.
- <완벽한 사과는 없다> 본문 中 -


 또 하나 더, 나 역시도 포함이 되겠지만 자녀를 둔 부모의 입장에서 아이가 바른 가치관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나눌 줄 아는 참된 인성으로 길러내는 것이 훗날 우리 아이들이 몸담게 될 사회에 전향적으로 이바지할 수 있는 길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물론 나부터 바른 생각으로 좋은 본보기가 되어줘야겠지만. 아이와 함께 지속적으로 배우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이 부모의 가장 큰 역할이라 생각이 된다. 해서 우리 아이들이 피해자도 방관자도 가해자도 되지 않도록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건강하게 잘 자랄 수 있기를 염원한다.

 하여 혹시 유아자녀가 있다면 용서에 대해서 어른도 함께 읽으면 좋을 그림책 하나를 소개를 하며 글을 끝맺고자 한다. 그림책을 함께 읽으면서 '용서'에 대하여 깊게 고민하고 이야기를 나눠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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