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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즈 Mar 26. 2023

사람을 살게 하는 동력은 무엇인가

지구 끝의 온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책을 읽은 후, 김초엽작가에 대한 감명으로 찾아 읽게 된 <지구 끝의 온실>. 장편 소설이다 보니 단편보다 속도감은 더뎠으나 자세하게 각 인물들의 서사를 따라가며 공감할 수 있어서 좋았다. 더스티라는 지구 종말의 계기로 다시 세상을 재건할 수 있었던 과정을 3부로 나눠 각 주요 인물의 시점에서 하나의 큰 사건의 조각들을 맞춰나갔다. 동일한 상황에서 그를 인식하고 인물의 서사를 이해하는 과정이 틈 없는 짜임새를 보여주었다. 궁금증을 자아냈던 인물들의 사연과 펼쳐 놓았던 일련의 사건들이 뒤로 갈수록 모두 명쾌하게 해소되었고, 흐름이 흐려지거나 대충 넘어가는 법 없이 하나로 이어지며 결말까지 힘을 잃지 않고 탄탄하게 소설이 이어졌다. 이번에도 흥미와 동시에 여러 가지 인간에 대한 물음에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김초엽 작가의 <지구 끝의 온실> 소설을 재미있게 잘 읽었다.

 여러 가지 생각 거리가 많았지만, 특히 주목해서 읽어낸 주제는 "눈앞에 둔 멸망 앞에서도 결코 순응하지 않고 인간을 살게 하는 동력은 무엇인가?"였다. 그 외에도 공포와 불안에서 인간의 본능과 무엇이며, 선과 악에 대한 물음과 '선'은 어디까지 행해져야 하며 '악'은 어디까지 정당화가 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더스트 시대에는 이타적인 사람들일수록 살아남기 어려웠어. 우리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후손이니까. 우리 부모나 조부모세대 중 선량하게만 살아온 사람들은 찾기 힘들겠지. 다들 조금씩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딛고 살아남았어. 그런데 그중에서도 나서서 남들을 짓밟았던 이들이 공헌자로 존경을 받고 있다고.

 선과 악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내릴 수 있을까? 생각해 봐야 하는 아이러니이다. 과정과 방법이 어찌 되었든 생존으로 후대를 이을 수 있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종의 보존 자체를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면 존재하게 된 후손들은 감사하다고 해야 하는 것일까, 비록 그 살고자 했던 생존 방식이 남을 짓밟고 살고자 하는 단 하나의 목표로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잔혹했다 할지라도? 그렇다면 그 원죄는 어떻게 갚으며 살아가야 할 것일까?


마을의 분위기는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았다. 누군가가 폐허 탐사를 하러 간 사람들을 비난했다. 그들이 부주의하게 마을의 존재를 드러냈을 거라고. 그러지 않고서는 마을이 외부에 노출될 일이 없다고 주장했다. 폐허 탐사조는 매번 인원 구성이 바뀌었는데, 회관에서 그중 누가 잘못했는지를 가려야 한다며 말다툼이 크게 벌어졌고 대니가 와서야 겨우 상황이 수습되었다. (중략) "돔을 없애는 거야. 그냥 모두가 밖에서 살아가게 하는 거지 불완전한 채로. 그럼 그게 진짜 대안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겠지. 똑같은 문제가 다시 생길 거야.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어. 뭔가를 해야 해. 현상 유지란 없어. 예정된 종말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을 계속해서 벌이는 것 자체가 우리를 그나마 나은 곳으로 이동시키는 거야."

 공포가 엄습하면 사람들은 원인을 파악해 제거해서 다시 안전한 상태로 복귀하고자 한다. 원인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의견차가 생기고 공포의 무게에 따라 그 차이는 균열과 분열을 일으키게 된다. 다시 협력하고자 공동의 적을 만들어 비난하고 그 적을 제거하기 위해 사람들은 다시 협력한다. 공동의 목표가 생긴 거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소설에서는 한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누군가는 온실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온실로는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었다. 단 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것이었다. 그 경계가 서로의 불신과 불합리를 낳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소설 속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안과 팍의 경계를 없애는 건 어떨까? 안에는 안대로, 밖은 바깥대로 어느 것이 더 좋은 환경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경계가 있으므로해서 안에서는 밖을 보지 못하고 밖에선 안을 보지 못해 불안이 증폭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불안은 옳고 그름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불확실한 미지의 영역에서 시작되고 더욱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의구심은 적대감으로 표출되기 쉽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은 그 경계 자체를 허물어 버리는 것이다. 서로 타협하며 안과 밖의 경계, 흑과 백의 논리가 아닌 생존하고자 하는 인간이라는 하나의 집단으로써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를 밝고 올라서는 것이 아니라 서로 힘을 모은 시너지로 함께 나아가는 법을 모색해 보는 것이다.


나는 왜 망해가는 세상에서 어른들은 굳이 학교 같은 것을 만든 걸까 생각해 보았다. 나를 비롯한 아이들은 대체로 하품을 하며 수업을 듣는 반면, 칠판 앞에 선 어른들은 늘 의욕에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이것이 어른들의 몇 안 되는 즐거움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배워야 해서 학교를 운영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행위 자체가 어른들에게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고.(중략) 무엇보다 내게 주어진 일이 있어서 좋았다. 이 마을이 나를 꼭 필요로 해주는 것 같아서.

 ☑️ 인간을 살게 하는 동력
1. 존재의 의미와 의욕, 의지
 살고자 하는 의욕과 그 속에서 스스로 행할 수 있는 자유의지.
 자발적으로 재능을 나누고 조직원으로써 내가 누군가에게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존재라는 인식은 중요하다. 이는 회사나 사회 안에서도 통용된다.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이 조직에서 꼭 필요한 일을 한다라고 여긴다면 그 일에 대한 자부심과 자긍심이 생긴다. 이로써 더욱 열정을 쏟게 되고 상대가 보내는 기대에 부응하고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기 발전을 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된다. 이는 사람들에게 생기를 북돋아주고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나아가 사회를 위해서 내가 기여하고자 하는 의무와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사회적 책임을 느끼게 하며 존재의 이유를 만들어 준다.


프림 빌리지는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걸. 그렇지만 이곳에 남겠다고 거듭 말하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곤 했다. (중략) "이게 마지막은 아니야."

☑️ 인간을 살게 하는 동력
2. 지속적인 자기 암시와 미래의 계획, 희망
 잘 될 것이라는 지속적인 긍정의 자기 암시와 그러한 긍정을 구체화하여 세우게 되는 계획들은 곧 희망이 된다. 마지막은 아니라는 생각이 값진 결과를 위한 인고의 과정이 되고 어떤 고통도 감수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힘든 시간들을 내가 실현할 수 있는 당장의 계획들로 극복해 나가고자 한다. 그러다 보면 자기 발전과 더불어 상황을 보다 지혜롭게 처신할 수 있는 능력과 안목이 생기게 되어 희망을 보게 된다. 희망적인 미래는 나의 기동력을 더 끌어올릴 수 있는 좋은 자극제가 된다.


아마라는 누구보다 이곳에 오고 싶어 했는데, 누구보다 이곳에 머무르고 싶어 했는데, 왜 우리는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고, 어떤 곳도 영원하지 않은 걸까. (중략) "다들 어떻게 이 마을을, 이 온실을 지켰는데....

☑️ 인간을 살게 하는 동력
3. 욕구와 노력
 하고자 하는, 되고자 하는 이상향을 위한 욕구가 현재의 고통을 버티게 해주기도 한다. 사람들은 목표를 향한 고통을 필수의 시간이라 여기고 노력으로 극복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이 쌓였을 땐 그 어떤 것이든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희망을 바라보며 그간 쌓아온 과거가 있다면 또 그것들이 굽이굽이 작은 성취들을 맛보게 했다면 내가 견고히 쌓아 올린 성을 쉽게 허물긴 힘들다. 그만큼 애정과 노력 시간 그 이상의 많은 의미가 담긴 나에게 특별한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것들로 작은 성공까지 이루었다면, 다행히도 목표달성에 이르렀다면, 또 다른 욕구를 향해 달려가게 된다. 그리고 노력으로 이룬 성과에 노력의 힘을 학습적으로 믿게 됨으로 자기 신뢰와 확신이 구축되어 다음의 목표를 향해 도약하게 될 원동력을 얻게 된다.


레이철이 마을의 해체를 원치 않았던 건 이 마을을 자신의 실험실로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그럼으로써 지수를, 지신의 옆에 붙잡아두고 싶었던 거였다. 정비사가 아닌, 지수를 옆에 두고 싶어 했던 것이다.

☑️ 인간을 살게 하는 동력
4. 사랑
 이 소설에서는 사랑이란 감정을 단순하지 않게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독자가 느끼기엔 길게 풀어낸 관계의 과정에서 느낀 건 결국 서로 간의 사랑이었다. 인간을 살게 하는 동력 중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내가 지켜야 할 가족이 있고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인간은 기꺼이 살게 된다. 앞서 말한 모든 인간의 욕구와 욕망도 사랑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인 다른 인간에 대한 사랑이든, 내가 만들고자 하는 미래에 대한 사랑이든, 범우주적인 만물에 대한 사랑이든, 모든 것은 사랑으로 귀결된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작은 부분에서도 행복을 느끼고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폭도 생기며 모든 건 잘 될 거라는 희망도 생긴다. 비록 나의 현재가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그 고통마저도 내 삶의 한 부분이라 느끼며 껴안고 언젠간 끝나게 될 고통의 희망을 놓지 않으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흔히들 현시대를 팍팍한 현대사회라 일컫는다. 그럴지라도 사람 사는 사회에서 사랑이 이유가 되어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있다면 분명 지금 보다 더 나은 미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피라미드형 생물관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식물과 미생물, 곤충들은 피라미드를 떠받치는 바닥일 뿐이고, 비인간 동물들이 그 위에 있고, 인간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완전히 반대로 알고 있는 셈이지요.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은 식물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지만, 식물들은 동물이 없어도 얼마든지 종의 번영을 추구할 수 있으니까요. 인간은 언제나 지구라는 생태에 잠시 초대도니 손님에 불과했습니다 그마저도 언제든 쫓겨날 수 있는 위태로운 지위였지요.

 마지막으로, 하나 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꼭 짚고 넘어가고 싶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자연과 인간. 하지만 현재 환경과 자연 파괴로 공생해야 하는 관계에 분열이 일어나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지구의 온도는 1.1도가 올랐다. 1.5도가 티핑포인트라고 한다. 티핑포인트란 더는 예측하고 조절할 수 없는 포인트를 말한다. 더 이상 손 쓸 수도 없고 되돌릴 수도 없단 뜻이다. 이에 대한 심각성을 인지하고 함께 생각해 보며 환경과 지구를 위해 목소리를 내보고 싶다. 내가 살아가는 동력인 배움에 대한 갈망으로 다음 목표는 자연과학에 대해 탐구해 볼 예정이다. 나 또한 자연과학에서 문외한이기 때문에 4월의 도서는 나와 같이 자연과학에 기초지식부터 쌓아가기 좋은 책들을 추천하며 블로그를 통해 함께 생각거리를 제공하며 읽어나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한다.


 이상 <지구 끝의 온실>을 읽으며 나름대로 무엇이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이러한 생각은 소설의 발단부터 결말까지 한결같이 이어지는 생각이었기에 내가 선정한 이 소설의 주제의식이 되었다. 정답처럼 나열해 놓았지만 이것들은 결코 정답이 아닐 수 있다. 원래 쉽게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것이 진리라고 했다. 나 또한 구구절절 나의 생각을 정리해 보았지만 앞으로도 글을 쓰면서 내 삶 동안 끊임없이 묻고 방향성에 대해 고민해 볼 것이다. 나의 글을 계기로 자신만의 존재의 이유와 이 사회에서 어떠한 책임으로 살아갈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삶을 위한 동력은 무엇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가진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다.




Ps. SF소설 《지구 끝의 온실》 책리뷰입니다. 소설 속 내용을 발췌하여 지극히 개인적인 사색을 담고 생각거리를 찾아 저의 의견을 써 내려갔습니다. 앞 뒤 줄거리를 제외하고 단락의 단면만 발췌하여 저의 생각을 기록한 부분이, 이 책을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 혹시나 편견과 왜곡을 가져다주거나 이 책을 읽은 독자들에게는 생각의 간극을 가져다 주진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비롯된 생각거리를 제 나름의 해석으로 솔직하게 담은 글이기에 평어체로 작성하였고, 저의 생각이 다양한 관점 중 하나로 이해해 주시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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