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직장생활과 은퇴 이후의 삶

by 스텔라언니

아빠는 포항제철, 즉 지금의 포스코에 입사하셨다. 포항의 허허벌판 바닷가에 제철소를 만드는 일에 투입되었다. 포항제철의 창립멤버였던 것이다. 아빠가 모시던 회장님은 박태준 씨였다. 그는 카리스마 있고 추진력 있는 사람이었지만, 좀 폭력적이었다. 육사 출신이었던 박태준 씨는 부하 직원이 일을 잘 못하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발로 정강이를 걷어찼다. 아빠는 눈치껏 부지런히 일했기 때문에 박태준 씨에게 맞지 않은 거의 유일한 직원이었다.

고로에 불을 붙이는 박정희 대통령. 뒤에 서있는 두 남자 중 왼쪽은 나의 아빠, 오른쪽은 박태준 회장

아빠는 포항에서 일하시느라 집에는 자주 오지 못하셨다. 내가 4~5살이 될 때까지 아빠는 포항에 계셨다. 그래서 아주 어렸을 때는 아빠를 자주 보지 못하였다. 가끔 보는 아빠가 낯설고 무서웠다. 아빠는 오랜만에 보는 막내딸이 귀여워서 놀아주려 했지만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빠는 포항제철에서 일하면서 심한 스트레스로 위장병에 걸렸다. 결국 7~8년 후에 수술을 받아야 했다. 아빠는 처음으로 회사 임직원들 앞에서 발표하던 때를 생생히 기억하셨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손에서 땀이 줄줄 흐를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도 발표를 여러 번 하자 긴장감이 많이 낮아졌다. 처음으로 쇳물이 기계를 통과하던 날 박정희 대통령이 와서 직원들을 격려하였다. 아빠와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여사, 박근혜 씨가 함께 사진을 찍은 것이 아직도 남아 있다.

포항제철 퇴사 후 아빠는 한동안 백수로 지냈다. 4개월 정도 백수로 지낸 후, 대림산업에 취직하였다. 아빠가 재취업에 성공한 날, 엄마는 우연히 명동 한복판에서 아빠를 보았다. 아빠는 큰 길가에서 팔을 휘저으며 신나게 걷고 있었다고 한다. 대림산업에서 15년 정도 일한 후, 대림대학의 학장으로 취임하셨다. 그때 아빠의 연세는 70세였다. 남들은 은퇴해서 노년을 즐길 때, 아빠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신 것이다.

대림대학은 전문대였는데 교수들은 박사 출신이었다. 그들이 가르치는 내용은 학생들의 취업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빠는 교수들에게 실용적이고 직장에서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내용으로 교재를 새롭게 만들라고 지시했다. 교수들은 아빠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매우 귀찮아했다. 그래도 아빠는 뚝심 있게 추진해 나갔다.

당시 대림대학에는 가수 조성모가 재학 중이었다. 1997~98년은 조성모의 전성기였다. 조성모는 설날에 우리 집에 갈비 세트를 보냈다. 엄마는 갈비찜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조성모가 선물한 갈비를 먹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아빠는 75세에 학장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 몇 년간은 집에서 조용히 지내셨다. 유일한 소일거리는 동네 뒷산 약수터에 물을 뜨러 가는 것이었다. 7년 후에 나는 첫 아이를 낳았다. 아빠와 엄마는 내가 일하는 동안 아이를 돌보아 주셨다. 아빠는 매우 무뚝뚝하고 카리스마 있는 성격이었지만 손녀에게만큼은 다정하고 재미있는 할아버지였다. 소꿉놀이, 병원 놀이를 같이 하고, 동네 놀이터에 매일 같이 놀러 가고, 집 앞에 있는 다이소에 종종 들려 중국산 싸구려 장난감이나 문구류를 원 없이 사주는 좋은 할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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