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고향은 개성이다. 개성 출신이 대부분 그러하듯 엄마 역시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높다. 엄마 이야기를 들어 보면 개성만큼 살기 좋은 도시는 없는 것 같다. 일찍이 고려의 수도였으며, 상업이 발달하여 물자가 풍부하고 교육열이 높았다.
외할아버지는 개성에서 큰 양조장을 운영하셨다. 그래서 엄마는 어린 시절부터 양조장 실험실에 있는 비커나 증류 기계를 보고 자랐다. 집안 형편은 넉넉한 편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외할머니가 엄마 세 살 때 돌아가셨다. 늘 위가 아프다고 하셨는데, 마흔 중반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엄마는 일곱 형제 중 막내였다. 할아버지는 젊은 아가씨와 재혼했다. 새엄마는 동생들을 5명 낳았다. 엄마는 주로 큰 이모가 돌봤다. 큰 이모는 당시 호수돈 여고를 다니고 있었다.
엄마를 매우 예뻐한 사람은 둘째 외삼촌이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외삼촌은 엄마를 잃은 막냇동생이 늘 안쓰러웠다. 그래서 변소에 갈 때도 항상 같이 가주었다(옛날 한옥에는 변소가 외진 곳에 떨어져 있었다). 공부도 열심히 가르쳐주었다. 공부를 잘하는 막내 동생에게 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개성은 음식 문화가 유난히 발달한 곳이다. 겨울이 되면 집집마다 만두와 순대를 만들어 얼렸다. 엄마 말로는 개성 만두는 크기가 아주 커서 어른 손바닥만 했고, 한 개만 먹어도 배가 불렀다. 여름에는 호박찜을 해서 먹었다. 애호박에 십자 모양으로 칼집을 넣어 양념한 소고기를 넣고 끓여 먹는 것이다. 초간장에 찍어 먹었는데, 여름이면 엄마가 종종 만들어 주셨다. 겨울이면 가끔 속이 화려하게 들어간 보쌈김치를 만드셨다.
엄마는 만월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려 궁궐 유적지인 만월대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후에 호수돈 여중에 입학했다. 미국 선교사가 지은 사립학교로 개성의 중산층 이상 가정의 딸들은 대부분 호수돈 학교를 다녔다. 호수돈은 미국 보스턴을 한자로 읽은 것이다. 호수돈 학교에는 당시에는 보기 힘든 가사 실습실이 있었는데 싱크대까지 갖추고 있었다. 또한 학교 꼭대기 층에는 피아노 연습실이 여러 개 있었는데 아침이면 여학생들이 피아노 치는 소리가 개성 시내에 널리 퍼졌다.
엄마는 14살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한국 전쟁이 터졌기 때문이다. 1년간 공산주의 치하에 살다가 도저히 버틸 수 없어 형제들만 남한으로 피난을 왔다. 부모님과 어린 동생은 개성에 머물기로 했다. 곧 전쟁이 끝나리라 예상했지만, 그 후 엄마는 다시는 개성 땅을 밟지 못했다. 부산으로 시집간 큰 언니네 집에 도착한 형제들은 부모 없이 열심히 살아 나갔다. 엄마는 부산에서 여중, 여고를 나왔고 동국대 화학과에 진학했다. 당시 여성이 대학까지 공부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는데, 공부를 매우 잘한 엄마에게 형제들이 기회를 준 것이다.
엄마는 이후 계속 서울에 살았지만, 지척에 있는 고향 개성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한 달에 한 번 개성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꼭 참석했다. 다섯 명의 여자 동창들이 모여 점심을 먹고 수다를 떨었다. 40년이 넘도록 이 모임은 계속 유지되었다. 엄마를 비롯한 소녀들은 고향에 부모를 두고 온 슬픔을 서로 위로하며 지냈다. 여든이 넘어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되어서도 한 달에 한 번은 꼭 모여 서로 안부를 전했다.
개성 관광이 시작되었을 때, 동창들은 함께 개성에 가려고 알아보았다. 그러나 유적지나 관광지만 가고 시내 관광은 거의 못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엄마와 친구들은 여행을 포기했다. 그들이 가고 싶은 곳은 관광지가 아니라 어린 시절 살던 동네와 고향 집이었다. 부모님 산소와 다니던 학교에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개성에 간다고 해도 꿈에 그리던 고향 집은 갈 수 없었다. 아쉽지만 개성 관광은 시도도 안 해보고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