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성격이 내성적인 편이었다. 학교에서도 존재감이 미미했다. 7살에 학교를 갔으니 동급생에 비해 키도 작았고 마른 편이었다. 그런데 수학에 비상한 능력을 보였다. 담임 선생님은 엄마가 수학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고 따로 진도를 나가게 했다. 반 친구들이 수학을 배울 동안 엄마는 수학책을 혼자 풀었다. 문제를 풀다가 모르는 것이 나오거나 새로운 개념이 이해가 안 되면 선생님이 따로 가르쳐주었다.
지금도 동창 모임에 나가면 ‘아. 네가 김경희구나! 그 수학 잘하던 여자애!’라고 친구들이 기억한다. 피난을 온 후 부산에서 중고등학교에 다녔다. 데레사여고 재학 중 경남여고 편입 시험을 봤다. 딱 두 명 뽑는 시험에 엄마가 당당히 붙었다. 그러나 엄마는 학교에서 세례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데레사여고를 그만두고 경남여고를 다니면 왠지 학교를 배신하고 예수님을 배반하는 기분이 들었다. 편입을 포기하고 데레사여고를 졸업했다.
동국대 화학과에 들어간 후, 엄마는 한 번도 1등을 놓치지 않았다. 화학과에 여학생은 단 두 명뿐이었다. 엄마는 방학 때면 학교 도서관에서 선배들이 추천한 문제집을 매일 풀었다. 일본에서 출판된 화학 문제집이었다. 엄마는 화학 실험을 하는 것이 즐거웠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양조장에서 봤던 실험기구를 학교에서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한 방울의 액체에 들어 있는 화학성분을 분석하는 일은 섬세하고 꼼꼼한 작업이었다. 엄마는 졸업할 때 남학생들을 모두 제치고 과 수석으로 졸업했다.
엄마는 결혼 후에도 계속 과외를 했다. 동네 학생들에게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다. 나와 사촌들도 방학이면 엄마에게 수학을 배웠다. 같이 문제집을 풀고 바꿔서 채점했다. 엄마는 늘 ‘수학을 잘하면 다른 과목은 자동으로 잘하게 된다’고 강조했다. 나는 엄마만큼 수학을 좋아하진 않았다. 소설책 읽기를 좋아했고, 영어나 역사, 사회과목이 훨씬 재미있었다. 나는 전형적인 문과생이다. 그러나 나는 수학의 논리성을 좋아한다. 논리적으로 차근차근 풀다 보면 어느새 문제를 풀 수 있었다. 수학 문제를 풀었을 때의 쾌감을 나도 점차 좋아하게 되었다.
엄마는 치매 검사를 해도 늘 수학 점수가 높아 치매 판정이 나오지 않았다. “65부터 거꾸로 7씩 빼 보세요”라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시면 척척 대답하니 치매 등급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러던 엄마가 작년에 중풍으로 쓰러진 후, 한동안 인지기능이 떨어졌다. 수학을 그렇게도 잘하더니 5+8도 못하고, 5+5 정도만 할 수 있었다. 이제는 많이 회복되셔서 간단한 연산도 잘하고, 원소기호도 물어보면 바로 대답하신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