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5~6살쯤 되었을 때 아빠는 포항제철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4개월 가량 백수로 지냈다. 나는 그때 아빠와 동네 뒷산에 자주 놀러 갔다. 우리 동네에는 거북산이라는 야트막한 산이 있었다. 부지런한 아빠는 싸리나무를 주워서 빗자루를 만들고 그걸로 마당을 쓸었다.
하루는 아빠가 산에서 크게 다친 적이 있다. 타이어를 반쯤 땅에 묻어 운동기구를 만든 것이 있었는데 , 아빠는 타이어 위에 누워 스트레칭을 하다가 넘어지셨다. 목을 다치셨는데 다행히 집에 돌아올 수는 있었다.
천성이 부지런한 아빠는 집에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마당 한 구석에 동물 농장을 만드셨다. 오골계, 오리, 토끼, 금계를 키웠다. 아빠의 백수 기간이 좀더 길었다면 마당을 밭으로 바꿔놓으셨을 것이다. 아빠는 봄이 오면 마늘, 배추, 무, 콩, 깻잎을 심겠다는 원대한 꿈을 꾸고 있었다. 다행히 아빠는 취업에 성공했고 우리집 마당은 그대로 보존되었다.
아빠가 회사에 나가자 동물을 돌볼 일손이 부족했다. 엄마와 아빠는 오골계와 토끼, 오리를 잡아먹었다. 아빠가 닭을 잡아 뜨거운 물로 깃털을 다 뽑으면 엄마는 삼계탕이나 닭볶음탕을 해주셨다. 오골계는 검은 색이라 별로 먹고 싶지 않았다. 나는 오골계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토끼나 오리고기 볶음은 맛있게 먹었다.
나는 그 무렵 팔이 부러져 크게 다쳤다. 집안일을 도와주던 친척할머니와 동네 마실을 갔는데, 그 집 소파위를 걷다가 그만 넘어진 것이다. 아빠는 접골원에 데려갔지만 나는 밤새 아파서 제대로 잠을 못 잤다. 엄마는 다음날 연희동에 있던 큰 정형외과에 나를 데려갔다. 나는 수술을 받았고 한동안 입원했다. 의사 선생님은 내가 혹시 성장점을 다쳤다면 한쪽 팔은 자라지 못할 거라고 했다. 엄마는 그 이야기를 듣고 하염없이 울었다. 다행히 나는 성장점을 다치지 않았고, 팔이 아주 조금 휜 채로 자라기는 했지만 팔을 쓰는데 불편함은 전혀 없다. 친척할머니는 본인이 아이를 제대로 보지 못해 다치게 했다고 자책하며 매우 미안해 하셨다. 그러나 나는 금방 회복했고, 이후엔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팔이 다 나아서 피아노를 배우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