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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텔라언니 Dec 27. 2023

구산동은 어떤 동네였나?

 서울에 오래 산 사람도 은평구 구산동에 산다고 하면 잘 모르는 동네라고 했다. 그래서 연신내, 불광동 근처라고 꼭 설명을 해줘야했다.


  은평구는 서울에서 변두리 동네지만 교육열이 높고 살기 좋았다. 학교가 많았고 입시 결과도 좋았다. 예일여고와 대성고가 유명했다.


 나는 구산동에서 태어나 30년을 살았다. 지금은 빌라촌이 되었지만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작은 단독주택이 많았다. 아파트는 많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은 서로 잘 알고 지냈다. 내가 어릴 때는 집에 전화가 없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에 전화를 사용하러 오곤 했다.


 앞집 최씨 할머니는 나의 태몽을 꾸셨다. 울창한 소나무숲이 나의 태몽이었다. 최씨 할머니는 안타깝게도 자식들이 빚에 쫓겨 함께 야밤도주를 하셨고 그 이후로는 만난 적이 없다.


 어린 시절 우리 동네 찻길에는 차가 많지 않았다. 집집마다 승용차를 굴리지 않던 시절이다. 널찍한 길에는 뛰어노는 아이들이 많았다. 친구네 놀러가면 벨을 누르지 않고 “00아 놀자”하고 창밖에서 외치면 친구가 곧 나왔다.

집앞 골목길

 구산동에는 성당이 없어서 우리는 역촌동 성당을 다녔다. 역촌동 성당 주임 신부님은 대대로 성격이 강하신 분이 많았다. 서울대교구에 민원을 많이 넣기로 유명한 역촌동 본당에는 성격이 센 신부님을 배정한다는 소문이 들리기도 했다. 나는 이 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첫영성체를 했고 성가대를 했으며 대학교 때 첫사랑의 열병을 앓기도 했다.


 이웃에 있는 갈현동에는 청산학원이라는 입시학원이 있었다. 나는 친구와 중학교 때부터 이 학원에 다녔다. 유머러스했던 학원 영어 선생님을 좋아해서 선생님 앞으로 매일 매일 노트에 편지를 썼다. <안네의 일기>를 보고 따라한 것이다. 선생님께 노트를 드리고 싶었지만 결국 부끄러워서 드리지 못했다.

 

 결혼 후에는 구산동에 자주 가지 못했다. 엄마 아빠가 나의 육아를 돕기 위해 구산동에서 우리 아파트 단지로 이사 온 이후에는 더더욱 가본 일이 없다. 그래도 구산동을 떠올리면 여전히 그립고 애틋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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