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결혼전까지 근 29년을 함께 지냈다. 또래 형제가 없는 내게 엄마는 가장 가까운 베프였다. 학교가 끝나고 돌아오면 안방에서 조잘조잘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엄마는 웃으며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가장 오래된 기억은 아주 어릴 적 새벽의 한 장면이다. 아침 일찍 눈이 떠진 나는 부엌에서 일하는 엄마 곁으로 갔다. 엄마는 콩나물무침을 하려는지 콩나물을 데치고 있었다.
엄마는 밥그릇에 데친 콩나물을 덜어서 나에게 주었다. 아무 양념도 하지 않은 것이었다. 콩나물 자체의 고소한 맛으로 먹었다. 나는 아무 양념도 하지 않은 콩나물을 이후에도 좋아했다. 엄마는 내가 야채를 잘 먹는다고 기특해하셨다.
두번째 기억은 6학년 때이다. 학교에 성가대가 있었는데 나도 친구들과 함께 했다. 그런데 왠일로 선생님이 합창 중에 나오는 솔로를 나보고 하라고 하셨다. 성가대 생활 3년만에 처음이었다. 엄마도 내가 노래부르는 걸 보러 왔다. 나는 흰 블라우스에 남색 스커트를 입고 갔다. 무릎까지 오는 흰양말을 신었는데 그만 한쪽 양말이 아래로 내려갔나보다. 나는 몰랐는데 무대 뒤에 엄마가 오더니 양말을 올리라고 했다. 아주 챙피했다.
세번째 기억은 대학 합격자 발표가 있는 날이다. 엄마와 나는 합격 확인을 하고, 앞으로 내가 갈 대학교 운동장에 합격자 명단을 보러 갔다. 엄마는 매우 신이 나 있었다. 등록금 고지서를 받았는데 나만 다른 과 친구들에 비해 30만원이 덜 나왔다. 그것을 귀신같아 알아본 한 엄마가 과사에 가서 따졌다. 그러자 내가 과 수석이라(한 학년에 10명밖에 안 된다) 등록금이 일부 면제되었다는 것이다. 그 아줌마는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고 엄마는 더욱 행복해했다. 나는 약간 얼떨떨하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네번째 기억은 엄마와 함께 파리 여행을 한 것이다.30살 새댁이던 나는 주재원인 남편을 따라 파리에서 살았다. 처음 외국 생활을 하려니 힘들었다. 겨울에 잠깐 한국에 나왔는데 엄마에게 같이 파리로 가자고 했다. 여행시켜드리겠다고.
같이 파리 거리도 걷고, 노트르담 같은 관광 명소도 다녔다. 내가 어학원에서 공부할 때면 엄마는 인근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엄마는 케밥이 든든하고 맛있다고 좋아하셨다. 남편과 셋이서 몽생미쉘로 여행도 다녀왔다. 숙소를 잘 못 잡아서 고생했지만 재미있었다.
그 시절 엄마를 보면 지금보다 훨씬 젊다. 기차 창문으로 프랑스의 시골 풍경을 물끄러미 보던 엄마가 생각난다.
이상하게도 엄마와 열흘 함께 파리에 있다보니 이제는 혼자서도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엄마가 한국으로 가신 이후에도 나는 잘 지낼 수 있었다.
내 인생의 큰 고비마다 함께 있어준 엄마
나에게 긍정적 사고와 신앙심, 예술과 독서에 대한 사랑을 물려주신 엄마에게 감사드린다
짤) 서점에서 내 책을 발견하고 좋아하는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