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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라하 Mar 02. 2024

아이에게 평생 속죄 해야 하는 미숙한 엄마

12살은 아주 어린 나이였다.

우리의 첫 유학지는 이탈리아 로마였다.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러시아로  유학을 떠나기로 결정한 우리는 우연히 이탈리아에서 온 교수님을 뵙게 되면서 첫 유학지를 이탈리아 어느 작은 도시에 있는 학교로 변경하게 되었다.

급하게 오디션을 보기 위해 5학년 여름 방학을 이용해 우리는 이탈리아로 갔고  간 김에 선생님들과 연결이 되어  레슨을 받아 볼 수 있었다.

아이의 눈에 신세계가 펼쳐졌고 그동안 한국에서 교수님들이 하지 말라고 했던 그러나 본인은 너무나 하고 싶었던 모든 표현들을 쏟아내며 연주한 아이는 오히려 칭찬을 받았고 오디션을 본 학교 교장 선생님께서는 " 너는 용감한 심장을 가졌구나" 하시며 당장 입학하기를 바라셨다.


하지만 아이는 그 당시 아직 5학년이었고 초등학교는 졸업해야 올 수 있다는 나의 말에 교장선생님은 동의하시지 않으셨지만 우리는 그렇게  조율하며 6학년 12월 수업 일수만 간신히 채우고 이몰라 아카데미라는 곳으로 떠났다.


외국어라고는 영어밖에 모르던 아이는 낯선 땅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열심히 이탈리아어를 배웠고 나도 물론 열심히 어학원을 다녔으나 마흔이 넘은 나에게 외국어란 정말 넘기 힘든 산이었다.

아무래도 언어 배우는 속도나 현지에 적응하는 속도가 빠른 아이는 우리 집의 실질적인 가장이 되어버렸다. 고작 12살의 어린 나이에 말이다.


외국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체류증을 신청할 때나 받으러 갈 때 하물며 집을 계약하는 일에도 나는 아이의 언어가 필요했다.

아이는 피아노를 치고 싶어서 온 것뿐인데 어느새 세상과 맞서야 하는 일이 많아졌다.

세상에 그대로 노출이 되어 버렸다.

그것만으로도 벅찰 아이에게 한 번씩 언어소통이 잘되지 않아 일이 틀어지거나 꼬일 때면 나는 아이를 탓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일을 망쳤다는 죄책감. 다시 또 시작해야 한다는 부담감. 그리고 엄마가 주는 비난을 어린아이의 몸으로 그대로 받아내고 있었다.

그러다 한 번씩 나에게 모멸감들이 밀려올 때도 있었다. 아이의 보호자로 와있지만 정작 내가 아이를 보호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 도대체 무엇을 해야 실수가 없을지 얼마나 언어를 공부해야 저 말들을 알아들을 것인지. 나는 점점 두려움 속에 파묻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힘든 과정을 겪으며 아이와 이탈리아 생활을 버텨 내면서도 우리는 한 번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생활비가 많이 들어 아빠가 보내주는 돈으로 살아내기가 무척 힘들었다.

하지만 아빠도 최선을 다해 마련해 주는 생활비라 부족하다고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냥 아끼는 수밖에 없었다. 한 푼이라도 아껴서 교수님께 사 레슨도 가야 했고 가끔씩 마스터 클래스에도 참가해야 했다.

참치 통조림을 좋아하던 아이는 이탈리아에서 파는 한국 참치 가격을 보더니 단 한 번도 사달라고 한 적이 없고 그게 너무 가여워 이탈리아 참치 중 고르고 골라 가장 한국참치랑 비슷한 맛을 가진 걸 찾아내기도 했다.

본인이 원해서 온 유학이지만 아직 아이이지 않은가. 치킨을 먹고 싶어 할 때는 집에서  만들어 먹였고 김치가 먹고 싶을 때는 배추를 찾아 여기저기 헤매기도 했다. 내가 들고 올 수 있는 배추 무게는 딱 두 포기. 젓갈도 없기에 피시소스라는 오징어를 발효시킨 소스를 넣고 김치를 담아줘도 그렇게 맛있게  잘 먹던 아이였다.


어느 여름날.

레슨 다녀오는 길에 이탈리아 아이스크림. 젤라토가 먹고 싶다는 아이에게 "다음 달 생활비 들어오면 사줄게. 지금은 쌀 살 돈 밖에 없어" 하며 아이의 작은 두 손을 꼭 쥐고 돌아서면서 혹시나 돈을 더 많이 못 보내주는 아빠에게 서운함을 느낄까 봐 아빠가 얼마나 힘들게 회사를 다니며 너를 뒷바라지하고 있는지 설명했더니

" 아빠가 보내주는 돈은 아빠의 외로움의 값이네

요" 하며  젤라토 안 먹어도 된다고 말하는 아이를 한참을 안아주었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고운 아이에게 나는 잔인하게 니 탓이라고 하면서 몰아붙였던 것이다.


둘이 너무너무 힘들어서 2년 전 즈음에 상담을 받았던 적이 있는데 그때 상담하다가 알게 되었다. 내가 아이에게 얼마나  못할 짓을 했는지.

그래서 아이에게 사과했다. 엄마가 너무너무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

아이는 그제야 처음으로 대성통곡을 하며 끝없이 끝없이 울었다. 많이 힘들었었노라고

엄마가 두려움에 휘둘려서 널 지켜주지 못해 너무 미안했다고 했더니 아이는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상담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상담을 받다 보니 엄마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도 미안한 건 미안하거다.


우리는 지금은 프랑스에 살고 있다.

이탈리아를 떠난 후 7년 동안 우리는 한 번도 로마에 간 적이 없었다.

지난달 아이는 로마로 여행을 갔었다.

감회가 너무 새로웠다고 한다. 예전에 우리가 살던 집. 다녔던 마트. 레슨 받느라 열심히 다니던 지하철. 다 둘러봤다고 한다.

마음이 어땠냐고 물으니 당시의 어린 자신을 위로해 줬고 그래도 잘 살아낸 자신이 기특하고 자랑스러웠다고 한다.

도망치지 않았고 끝까지 버티며 공부 잘 해낸 자신이 기특하다고 했다.

예전에 상담 선생님께서 아이에게 눈을 감고 이탈리아에 있던 어린 자신을 상상해 보라고 하셨단다. 아이는 바로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지금 그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주고 싶냐고 물으시니 "잘 해낼 수 있다고 꿋꿋이 버텨내라고 말해주고 싶다"라고 했단다. "그러면 그것이 나중에 너의 큰 재산이 될 거라고. 그래서 지금 네가 힘들어도 나는 너를 거기서 꺼내주지 않을 거야"라고 했다고 한다.


아이는 단단하게 자랐고  어려운 게 뭔지 궁핍한 게 뭔지 또 감사한 게 뭔지 잘 알게 되면서 성장했다.

엄마가 힘들면 지하철 타지 말고 택시 타자고는 해도 자신이 힘들어서는 절대 택시를 타지 않는 아이다.

어떨 때는 너무 고생을 한 것 같아 마음이 아프기도 하지만 그 경험들이  아이의 삶의 밑거름이 되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그 힘으로 아이는 오늘도 열심히 연습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그런 아들을 나는 항상 응원하고 격려하며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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