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광장에서 라 만차까지

루이스의 나라로

by 모든 한국학

"인생은 살아온 삶이 아니라, 살아온 기억이며, 그 기억을 어떻게 이야기하는 가에 달려있다. "

-마르케스(1927~2014,)




2006년 11월 22일 자정 무렵 , 나는 마드리드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마드리드까지 직항이 없어서, 프랑크 푸르트를 경유하여 마드리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찌어찌해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또 어찌어찌해서 짐을 찾았지만 나는 내내 잠결이었다. 한국 시간으로 밤을 새웠는데 시간이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르는 기분이었다. '이렇게나 먼 곳이었구나'. 지리감으로 너무나 멀리 왔다는 느낌에 낯선 스페인어만 들리니 입국장 문이 열리면 내가 두리번거리기 전에 루이스가 먼저 나를 알아보기만을 바랬다. 굳이 바람이 필요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입국장 문이 열리자 루이스의 얼굴이 내 앞으로 훅 들어왔다. 앗 깜짝이야. 인천공항처럼 입국하는 문과 마중 나온 사람이 서있는 대기 공간이 넓지 않았다. 마치 고속버스 터미널처럼 바로 앞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소도시 작은 공항 같은 느낌이다. 그렇게 나는 스페인 땅을 처음 밟았다. 내가 '루이스라는 스페인 사람'을 알지 못했다면, 거기까지 같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비행기표 만료로 '울며 겨자 먹기'로 집으로 돌아간 루이스가 이틀이 멀다 하고 이메일을 보내지 않았다면, 여행 가는 곳마다 엽서를 보내 그 말미에 스페인에 오라는 말을 백번쯤 덧붙이지 않았다면 말이다.


스페인 광장(Plaza de España)에서


전날 자정에 나를 공항에서 숙소까지 데려다주고 다음날 다시 나타난 루이스는 어댑터 같은 크기의 네모난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환영합니다.(Bienvenidos.) 열어보니 직사각형 입체 투명 유리 안에 마차를 탄 로마 시대 전사 이미지가 들어있었다. 여신의 시벨리우스(La Cibeles)란다. 시벨 어쩌고? 아직 잠이 덜 깬 환영선물이라더니... 발음이... 시벨? 갑자기 웃겨서 간 밤의 긴장이 다 풀렸던 기억이 난다. 루이스가 나를 데리고 처음 간 곳은 스페인 광장이었다. 동상이 그렇게나 반가울 일인지! 세르반데스와 <돈 키호테>의 주인공 이달고와 산초판사가 말을 타고 출정하는 모습이다. 이 동상은 루이스와 나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자신의 이메일 주소에서 '돈 키호테'라는 이름을 연상한 나를 신기(?)해 하면서 나에게 준 엽서의 장소다. 그 엽서를 받았을 때의 느낌은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남아있다. 그저 소설 제목과 우스꽝스럽게 묘사된 삽화 속의 이미지로만 알고 있던 <돈 키호테>에 대한 나의 가벼운 인식이 무게를 가지게 된 순간이었다.


%B5%B7Űȣ%C5%D7-rosen11.jpg


자세히 들여다보니 살아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스페인어는 물론 이베리아 반도의 지리적 위치에도 문외한인 내가 이 동상 앞에 설 줄은... 세르반데스의 동상이 들고 있는 책은 당연히 <돈 키호테>겠다. 어릴 적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세계 문학 전집에서 빠지지 않던 작품이었으나, 언제나 관심은 셰익스피어(1564~1616, 영국)의 작품에만 기울어져 있었다. 그런데 정작 내가 배웠던 영어는 미국식 영어였고 세계 문학에서 스페인어권 작품을 다루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스페인어는 유엔 공식언어 중의 하나며, 전 세계 스페인어 모국어 인구는 세계 2위이며, 무려 20개국에서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낯설기까지 했다. 스페인어로 쓴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10명이 넘는다. 모두 낯선 이름들이다. 그렇게 동상을 탑돌이 하듯이 한 바퀴 돌아보니 세르반데스 반대편에 여성 인물상이 있었다. '이 사람은 누구?' 하니 루이스는 모른단다.


madridd (23).JPG



파에야(빠에야) 냄비가 낯익다.


스페인 광장을 지나 숙소가 있는 근처를 거닐었다. 11월 말이라서 해는 일찍 졌으나 마드리드 거리는 아름답고 평온했다. 어느 식당에 들어가더니 스페인에 왔으니 대표적인 음식을 먹어봐야 한다고. 빠에야라는 음식이었다. 냄비가 낯설지 않다. 부대찌개가 연상되었다. 이래서 루이스가 부대찌개를 거부감 없이 먹었나? 한국 사람이지만 맵고 얼큰한 것을 잘 못 먹는 나 같은 사람은 마드리드에 와서 '빠에야' 먹으면서 살아야 할 것 같다. 보기에는 닭갈비 먹고 후식(?)으로 먹는 볶음밥 같은데 빠에야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이런 맛의 음식을 먹어온 사람이 한국에서 부대찌개를 어떻게 먹었을까. 한국 음식의 맛은 상대적으로 강렬하다. 거기 그렇게 앉아서 루이스와 한국어로 얘기하다 보니, 루이스에게 이유 없이 미안해 지려 했다. 서울에 있을 때 좀 더 친절하게 잘해줄걸 하는 후회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madridd (66).JPG
madridd (63)2.JPG



드디어 라 만차(La Mancha)에서


올리브 나무가 양쪽으로 자라고 있는 길을 자동차로 한 참을 달렸다. 멀리 지평선이 보이는 평원으로 돈 키호테의 배경이 되는 라 만차 지방에 도착했다. (Molinos de Viento de Consuegra) 방문하기가 교통이 마땅치 않은 곳인데 루이스가 자동차로 나를 직접 데려다준 것이다. 드넓은 평원에 커---다란 풍차가 서 있었다. 풍차들이 간격을 두고 여러 대(?) 서 있었다. <돈 키호테>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에피소드가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한 키호테 경이 풍차를 향해 달려드는 장면인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라 만차의 풍차는 그저 거인 정도가 아니라 5층짜리 아파트 정도는 되었다. 내가 봤던 소설 속 삽화들은 풍차와 사람의 크기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았다. 거인이라 착각한 돈키호테가 진짜 이상한 사람이구나 싶을 정도였는데, 저 정도의 높이라면 창을 들고 돌격하는 모습이 자연스럽겠다. (삽화를 넣으려면 고증을 충분히 하고 그려야 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아는 풍차 스타일이 아니었다. 내가 알고 있던 '돈키호테가 달려든 풍차는 뭔가 알록달록한 기둥색에 세모난 빨간 지붕에 달린 큰 바람개비가 달린 풍차였는데, 라 만차의 풍차는 밀가루처럼 하얀 벽에 차콜색 지붕이었다. 나는 단 한 번도 그것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니, 내가 아는 세계 최초의 근대소설 '돈 키호테의 이미지'는 그저 어린아이 수준이었다. 이 풍차는 라 만차 지역에서 생산되는 밀을 빻아 밀가루를 만드는 제분용이란다. 날씨는 조금 흐렸으나 아름다운 풍광이었다.


DSCN4954.JPG 풍차와 사람의 크기 차이가 보인다. 소장 사진


엘 토보소, 돈 키호테 미술관으로


휴일이었는데 마을에 거주하신다는 미술관 관리인은 나를 보고 반가워하셨다. 루이스가 한국에서 왔다고 나를 소개하니 그분은 몹시 반가워하시면서 나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고 하신다. 제가 스페인어를 모르는데요? 하는 나에게 펼쳐서 보여 주신 부분은 책 뒷면의 한자였다. 1960년대, 70년대 80년대 까지도 책의 뒷면에 출판사와 발행인 발행 연도 등을 한자로 인쇄했다. 내가 스페인어는 모르지만 한자는 1800백 자 필수 이수 세대다 보니 보통 명사정도는 읽을 수 있다. 다행이었다. 도움이 될만한 일이 있어서 기쁘기도 했다. 작은 도움 덕분인지 방명록을 남길 수 있다고 해서 뭐라고 써놓고 왔다. 내가 방명록에 남긴 글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미술관에 방명록을 남긴 사람 중에는 이탈리아 파스시트 무솔리니(Mussolini)도 있었다. (뭘 어쩌겠다고 거기까지 들어갔나?)

madrid (18).JPG
madrid (19).JPG
madrid (32).JPG 엘 토보소


나는 그해 완역 출판된 <돈 키호테> 한국어판을 들고 갔었다. 박물관에 이미 그 책이 전시돼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내가 들고 간 책은 루이스에게 주었다.



서로에게 스승이 되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중에 반드시 스승이 한 사람 있다는 말이 있다. (삼인행필유아사.三人_行_必_有_我師) 공자(孔子, 기원전 551~479년) 사후 제자들의 엮은 책 <논어(술이편 述而篇)>에 전한다. 공자님 말씀을 루이스와 나의 인연에 빗대자면, 언어와 문화가 다른 두 사람이 같이 길을 가면 서로에게 스승이 될 수 있다. 루이스는 서울에 머무는 1년 동안 나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고 거듭 얘기했지만, 사실 나야말로 루이스로 인해 세계에 대한 인식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조각조각 흩어진 어설픈 지식들이 다시 제대로 꿰어져 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토대가 되었다. 카페 동호회의 한국어 수업은 무료다 보니 자유롭게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루이스는 매 순간 성실하고 진지했다. 때로는 몸서리칠 정도의 진지함이 벅차기도 하였지만 우리는 나름 잘 견뎌냈다고 말하고 싶다. (푸하하하) 나는 그해 마드리드에서 일주일 동안 루이스의 일상을 경험해 보고, <돈 키호테>의 3차 출정지 바르셀로나로 향했다.




"인생은 살아온 삶이 아니라, 지금 기억하고 있는 삶이며, 영원히 그렇게 기억하고 싶은 삶이다. " (La vida no es la que uno vivió, sino la que uno recuerda, y cómo la recuerda para contarla.) 지난 20년 동안 우리의 이야기로 엮은 조각보는 앞으로도 계속 각자의 삶에서 덧이어 나갈 것이다. 내가 루이스가 살았던 하숙집 할머니 나이가 될 때까지 말이다.


20년 이후.pn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