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런 유형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한국에 처음 오는 외국인에게 한국 문화를 소개한다고 경복궁부터 데려가고 그런 식 말이다. '한국에 와서 어디 어디 가봤냐'라고 잘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런 점 때문에 멀더가 나에게 한국사람 같지 않다고 말했는지는 모르겠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멀더는 처음 한국에 왔을 때부터 론리 플래닛(Lonely Planet)에 서울 기사를 보내고 있었다. (여행자의 필수품 전설의 론리 플래닛!) 서울 구석구석을 돌아다녀서 나보다도 옛 골목길을 더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외국인 쪽에서 먼저 원하면 당연히 응한다. 이날 멀더를 동행한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비원에 가야 한다'라고 전화가 왔다. 비원이라...
그 어학카페를 드나들면서 나는 '창덕궁'을 처음 들었다. 하루는 외국인 A가 한국인 B에게 창덕궁을 어떻게 가냐고 물어보는 말이 들렸다. (창덕궁? 서울에 그런 궁이 있나...)나는 A가 뭔가 잘못 안다고 생각하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한국 친구 B가 '안국역에 내려서(3번 출구)... 똑바로 가면 (공간) 건물이 보여요... 계속 위로 조금만 가시면... ' 한다. "거기는 비원인데?..."라고 내가 중얼거리니 길을 물어보던 A 씨가 "네에! 창덕궁의 비원이요~!"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나도 모르게 말은 나왔고 혹시나 욕처럼 들릴까 입을 막았다. A 가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면서 나한테? 왜? 이런 제스처를 취하며 매우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나는 정말 단호히 부정하면서, 나를 가리키면서 아니 아니 나한테 하는 말이에요. (라고 영어로 잘 말해주세요라고 B에게 매달리면서 부탁했다.)
창덕궁의 후원을 비원이라고 불렀다는 것_그때까지 한 번도 의심 없이 궁의 후원을 궁이름으로 알고 있었던 나에게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디서부터 잘못 인식된 것일까... '를 따져서 무엇하리 다 핑계다. 말할 나위 없이 내 나라 문화에 무관심한 시절이었다. 그런 원죄(?)로 인해 창덕궁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창덕궁 후원은 자유 관람이 되지 않아서 언어별로 시간대를 예약한다. 이제 한국어가 중급인 멀더 더러 한국어 가이드를 받겠냐고 물었더니 잠깐 망설이다가 '어려울 것 같다'면서 영어로 듣겠단다. (아무래도... 일상 회화는 아니니까... 그럼 나는 영어로 들어야 되네...) 물론 그는 비원이 창덕궁의 후원을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그 사실을 안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후원은 오늘 처음 와본다 하니 '세상의 그런 일이! '라고 말하는 표정이다. '너는 너 고향 볼티모어에 뭐가 있는 줄은 아니?'라고 반격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그냥 자연스럽게 대화가 된다는 것이 만날 때마다 신기해서!
비원의 '원'이 사무공간(院)과 나라 정원(苑)이라는 의미로 명칭의 변화는 있었다. 역대 왕들이 사저처럼 사용한 이곳은 내가 처음 인식한 어감으로 비밀스러운(Secret)의 느낌은 아니었다. 창덕궁 돈화문을 지나 왕의 업무공간이 아닌 오른쪽으로 간다. 임금이 퇴청 후에 이쪽으로 나왔는지는 모르겠으나, 후원으로 향하는 5분 이상 걸어가는 야트막한 언덕길이 창경궁 담과 맞닿아있다. 창경궁의 현재 온실 부분이다. 서로 잘 보인다. 평평한 길이 아니니 오를수록 더 잘 보인다. 후원에서 처음 만나는 곳이 부영연못과 규장각(주합루)이 있는 공간인데, 그나마 여기는 언덕 아래 조성된 독립된 공간이니 눈에 띄지는 않겠다. 여기서 다시 연못을 품고 자연스럽게 지형을 따라 오르면 정조 때는 왕세자들이 공부했다는 누각과 정자들이 있다. 정자의 문을 닫으면 사생활이 보장될 수는 있겠으나, 얼음이 녹고 물이 흐르고 꽃피는 계절에 굳이 문을 닫을 이유가 있었을지 모르겠다. 후원의 모든 길은 말할 필요 없이 아름다운 곡선이다. 왕족이 부러운 적이 없었는데창덕궁의 후원이라면 담을 넘어서라도 들어갔으리라.
2006.01.23 부용지 부용정
<동궐도> 부분_ 주합루 어수문 부용정 부용지 일대. 네이버 사진
책에 미친(及) 덕에 중앙 관리로 발탁된 청장관 이덕무는 왕명에 따라 이역만리 연경(북경)에 가서 서점가를 뒤지고 다니며 가져올 수 있는 책은 다 구입해 온다. 장서의 목록은 어디에 메모를 해 가는 것이 아니라 그의 머릿속에 있다. 책방 주인이 내민 목록의 대부분은 이미 읽었거나 서지사항을 알고 있는 책이다. 연경으로 새로 들어오는 책이 있다는 정보를 얻으면 기다렸다가 구입해 온다. 한 권 한 권 책 제목을 확인하면서, 군주이자 자신보다 더 책에 미친 자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신하이자 학문적 동행이었던 이덕무와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 등이 그 먼 길에서 사 온 책은 창덕궁 후원 주합루에 차곡차곡 쌓였다. 정조는 2층짜리 건물의 1층은 규장각으로 2층은 주합루로 이름 지었다. 정약용을 포함하여 책에 미친 자들만이 지나다니는 특별한 문을 만들고(어수문) 그들과 차를 마시면서 자유롭고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눴다.(부용정) 그 연못에서 한가히 유영하는 물고기는 돌에 새겼다. 역대 왕들이 이 후원에서, 경복궁의 동쪽이자 창덕궁의 가장 안쪽인 이곳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휴식을 취했다. 다만, 순조대에 이르러 이 주합루에서 칼 찬 이들을 불러서 접대해야 했다니 이 지점이 나로 하여금 오랫동안 비밀스러운 장소의 뉘앙스를 품게 한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조선의 학자.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참조)
*동궐도(東闕圖) : 조선 후기 창덕궁과 창경궁을 조감식으로 그린 회화.
*입연기(入燕記) : 이덕무 저서. 1778년 3월 서울을 출발하여 윤 6월 14일 의주로 돌아오기까지의 연경(북경)을 다녀온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