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울 사는 로젠 Jan 11. 2024

07_원초적 본능의 추억

     ㅣ샤론 스톤의 지대한 공헌ㅣ


   창덕궁에서 새해를 열었던 2006년에는 한 달에 한번 정도 만났다. 다시 한국에 온 멀더는 한국어를 사용하는 문화적 배경까지 이해를 했는지 헤어질 때는 '전화할게요'라는 빈말까지 던지고 가곤 했다. (한국 사람같지 않은) 나는 평소에도 안부처럼 쓰는 저 빈말을 정말 싫어했는데 그 말을 외국인에게서 들으니 기분이 오묘했다. 나의 영어는 여전히 콩글리쉬 수준이었는데, 외국어는 결의를 가지고 공부해야 한다는 점을 번번이 느꼈다. 알파벳을 배울 때부터 들은 소리, 영어를 잘하면 좋은 대학에 간다? 정말 고리타분한 동기였다. 영혼을 사로잡히는 동기가 필요하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책을 가지고 오라 했더니, LA에서 친구에게 얻었다는 한국어 4급 교재가 있었는데 '고려대학교 한국어'였다. 이 책은 미국에 건너갔다가 멀더의 손에 이끌려(?) 다시 한국에 왔구나... 왜 웃음이 나오지?  2년 후에 다시 가져갔으니 그 책은 나는 한 번도 건너간 적이 없는 태평양을 몇 번을 오간 것인가. 교재를 여러권 들고 다니기는 했으나 예전(?) 처럼 어지간한 대화는 교재의 예문에 얽매이지 않고 편하게 했다. 대화의 주제는 경계가 필요 없었다.  약속을 바꿀 때는 한국어로 압축하여 문자를 주니 나는 또 얼마나 기쁜가. 장문의 영어 문자를 보내 나를 어지럽히던 시절은 이제 갔다.  사실 안 만나도 되는데 한 달에 한 번은 반드시 전화가 왔다. 


    그날도 거의 한 달 만에 어학 카페에서 공부하기로 해서 지하철로 가는 중이었다. 내가 약속 장소에 거의 도착할 즈음에 제이슨 문자가 왔다. '은행 비극.'  은행비극? 순간 '은행에 강도가 들어 금고를 털고 있나' 했으나 그런 속보는 없고, 전화기 폴더를 닫으려는데 다시 문자가 왔다. '20분 지각' 항상 15분을 늦는 멀더가 20분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뭔가 일이 생기긴 했나 보다.

    나는 이미 약속 장소에 도착했는데 또 문자가 왔다. 20분은 이미 지났다. 멀더는 갑자기 배가 고파서 햄버거를 하나 먹고 오겠단다. (이게 무슨 경우?) 내가 특수문자를 이용하여 하이폰 점 하이폰 (-.-)을 보냈다. 멀더는 알아듣고 (햄버거 안 먹고) 바로 갈 테니까 가까운 햄버거(!) 가게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란다. 정말 인간이 위대하다는 점을 과학 기술의 전환기(?) 때마다 느낀다. 2G 폰, 키보드 문자만 입력 가능했던 시절에도 정말 모든 감정이 전달되는 아이콘을 만든 것을 보면! 국 멀더는 한 시간이 지나서 기다려 나타났다. 내가 뭘 먹을 거냐고 물어보니 이대 정문 앞 사거리 중앙에 서서 360도 가게를 가리킨다. 이거 다 먹을 거란다. 그때는 찜닭이 대세였으니, '기분이 안 좋으면 안동찜닭 앞으로 가라'였다. 

   은행에서 돈을 바꾸는 데 1시간 반을 기다렸다고... 아... 그게 비극? (문학적이시네요.) 찜닭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한 시간 반!', 찜닭 한 조각을 가져갈 때마다 '한 시간 반' 이런다. (아니 너가 그렇게 거기 산다고 티내고 싶은 뉴욕은 일 년 내내 인터넷도 잘 안되더구먼...) 아니 거기서 얘길 하지 왜 여기서 분노하는 거야...(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격. 바로 이런 상황인데 지금 알려주면 돌아버리겠지...?) 찜닭에 밥을 볶아먹는 것까지 알려주고 나니, 먹을 것이 들어가서 그런지 조금 진정이 된 멀더는 오늘부터 자신이 서울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의 랭킹이 바뀌었단다. (**은행 연신내 지점이 1순위로 올라감.)  


    우리가 만나서 항상 하는 주제중의 한 가지는 영화이야기다. 벌써 20년이 지났으니 우리가 보고 토론한 영화의 양도 어마어마 하리라. 그날 얘기가 어쩌다 <원초적 본능>까지 갔는지는 모르겠다. 영화 <원초적 본능>의 원제는 'Basic Instinct'인데, 원초적은 영어로 프라이멀 primal이다. 물론 곧이 곧대로 기본 본능했으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겠나! 주연 배우 샤론 스톤이 취조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이리저리 꼬는 장면! 한국에서도 그 취조실 의자 신(scene)을 볼 수는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편집본이었다. 편집본이어도 청불이었다. 다행히(!) 나는 20대 초반이었고 친구와 함께 무사히 영화를 봤다. 영화를 같이 본 친구가 그다음 해에 미국 여행을 가서 유스호스텔에 묵었는데, 거기서 오리지널 버전을 봤다고 추후 나에게 알려줬다. 그날 숙소 케이블이 고장 나서 그 원초적 본능만 밤새도록 나왔단다. 그것도 오리지널 판으로... 원 없이 보았다고.

    그 에피소드를 멀더에게 들려주니, 자신도 오리지널 버전으로 봤다고 한다.... 어떻게?.... 1992년이면 너는 중학생이시네요? 아니 어떻게?...그나라는 그런거 엄격하지 않니? ..자신은 '나쁜 학생'이었단다... 가장 중요한 얘기는, 제이슨이 버클리 대학을 간 이유가 샤론 스톤 때문이었단다. '원초적 본능'에서 샤론 스톤이 버클리 출신의 작가로 나와서 그 학교를 목표로 삼았다고. (당시 나는 수능강사였다.) 이런 확실한 방법이? 영혼을 사로잡히는 동기란 바로 이거구나. 정말 섹시하고 지적인 여배우가 나오는 영화의 오리지널 버전을 필수도서목록에 올려야 한다.(개인차 있음)

                                                             




*원초적 본능(Basic Instinct) : 폴 버호벤(Paul Verhoeven) 감독. 1992년 작. 범죄 추리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