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STONER
그대 내게서 계절을 보리
추위에 떠는 나뭇가지에
노란 이파리들이 몇 잎 또는 하나도 없는 계절
... 그대 이것을 알아차리면 그대의 사랑이 더욱 강해져
머지않아 떠나야 하는 것을 잘 사랑하리. _셰익스피어《소네트 73번(Sonnet 73)》
유한한 인생의 의미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스토너는 열아홉 되는 해에 대학에 보내진다. 스토너의 집에서 약 40 마일 떨어진 미주리 대학에 농과 전공으로 부모 세대 보다 더 훌륭한 농부가 되기 위한 군청의 결정이다. '대학'이라는 개념보차 없던 스토너는 농과대학에서 암기 위주의 공부를 하며 '집에서 하는 허드렛일 보다 조금 덜 피곤한 허드렛일을 하듯이' 학교에 다닌다. '문학'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던 스토너는 2학년 교양 영문학 개론수업에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처음 접한다. 스토너는 교수가 낭독하는 14행의 시를 숨죽이며 듣는 자신을 느낀다. "셰익스피어가 30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자네에게 말을 걸고 있네, 스토너 군, 그의 목소리가 들리나?'". 교수의 질문에 대답을 할 수는 없었지만 스토너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느낌을 처음 받는다.
"늦가을의 쌀쌀함이 그의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창백한 하늘 아래 둥글게 말리거나 비틀려 있는 나무들의 벌거벗은 가지가 보였다. 수업에 들어가려고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학생들이 중얼거리는 소리, 신발이 닿는 소리, 추위에 발갛게 변한 채 가벼운 산들바람을 피해 수그린 얼굴들, 그는 호기심에 차서 그들을 바라보았고 그들이 자신과 아주 멀지만 또한 아주 가까운 존재인 것 같았다." (p21) 이미 알고 있는 세상과 사물이 섬세하게 느껴지며, 스토너는 이런 느낌을 간직한다. 스토너가 문학에 눈을 뜬 순간이며, 이로부터 스토너는 문학과 또 그것을 가르치는 일과 사랑에 빠진다. 아처 슬론 교수는 스토너 본인이 정의 내릴 수 없었던 상태를 설명해 준다. '이것은 사랑일세' '자네는 사랑에 빠졌어'
소설 <스토너>는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소설을 읽고 '아름다웠다'는 느낌이 드는 경우는 드문일인 것 같다. 모든 문장은 간결하고 정직하고 그야말로 아름다웠다. 이제 막 개관하는 근사한 도서관에 꽂힌 책들처럼, 먼지 없이 정갈하고, 단정하게 빛나며, 자신의 자리를 정확히 지키고 있는 듯하였다. 군더더기 없이 묘사와 비유. 어디선가 들어봄직한 말은 일체 끌어다 쓰지 않고도 놀랍도록 상황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는 글 솜씨를 보여준다. 섬세하게 본질을 파고드는 문장들은 스토너의 인생 모든 단계에서, 스토너뿐만 아니라 글을 읽는 보통의 인생들이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그때그때의 감정들을 너무나 완벽하게 그려내고 있다. 독자인 내가 만들 수 있는 문장으로 이 아름다운 작품에 의견을 다는 것이 매우 초라하게 느껴진다. 누구나 한 번쯤 겪을 만한 사건으로 희비가 반복되는 스토너의 인생에 왜 이다지도 깊이 빠져 들어 읽게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문장의 아름다움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삶에서 바라는 것.
"그는 우정을 원했다. 자신을 인류의 일원으로 붙잡아줄 우정. 또 혼자 있기를 원하면서도 결혼을 통해 다른 사람과 연결된 열정을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이 느끼고자 했던 열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열정은 사그라들었다. 그는 사랑을 원했으며 실제로 사랑했다. 그는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지만, 평생 동안 무심한 교사였음을 그 자신은 알고 있었다.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 (p.386)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인생에서 무엇을 바랐는지. 정년까지 수업에서 학생들과 문학을 이야기하고 싶던 스토너의 열정은 병으로 중단되었고, 그의 의식이 희미해져 가며 이런 생각에 빠져든다. 책을 읽고 있는 나도 스토너의 마지막에 가까운 여정을 그와 같이 깊이 빠져들어 집중하다 보니, 곧 다가올 스토너의 죽음이 마치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죽음을 앞두는 것 같은 슬픔이 느껴졌다. 그리고 정말 슬펐다. 문학 작품 속에서 주인공의 죽음은 그저 결말로 받아들일 뿐이었는데, 가장 평범한 삶을 산 그의 죽음은 왜 이다지도 가슴에서 슬픔이 느껴지는 것일까. 그가 일생을 두고 사랑하고 또 사랑한 문학이라는 학문과 자신이 이르고자 했던 어떤 경지를 담아내고 싶은 책의 한 페이지에 마지막 손길이 보내는 장면이 그렇다.
그렇게 소설의 끝에서, 유한한 우리 삶의 의미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이런저런 사색에 빠져 잠시 여운을 가지다가 그 슬픔에서 벗어나고자 다시 소설의 첫 장으로 되돌아온다. 농부의 아들로 그저 소박한 생활이 전부였던 스토너가 처음 대학 건물을 마주했을 때의 그 순간으로 다시 간다. '높게 자란 느릅나무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건물들, 위풍당당한 건물. 널찍한 초록색 들판에 빨간 벽돌 건물들이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던 열아홉의 스토너, 생전 처음 농가의 밖을 나와 자신과는 먼 세상의 일로 여겼던 대학을 마주한 스토너를 다시 떠올린다. 그의 앞에 펼쳐질 삶을 이미 알고 있지만 그래도 또 스토너가 살아갈 순간순간을 같이 살아보고 싶은 마음으로. 그렇게 또 한 사람이 학문에 눈뜨고 매 순간 선택 앞에서 자신의 삶을 일구어 나가는 모습을 다시 또 들여다볼 수 있다. 다시 설렘을 시작한다.
스토이시즘(Stoicism)
스토너(Stoner). 주인공 이름에서 스톤(Stone)이 연상되는 데, 저자가 영문학 교수였던 만큼 의미나 의도가 있지는 않을까 궁금했다. 스토너는 스톤과 관련이 있을까? 왜냐하면 스토너가 어떤 인식의 전환이나 대학에서 지위의 변화가 생길 때는 미주리 대학의 건물_제시 홀 앞의 여섯 개의 기둥(스톤)에 대한 묘사가 따른다. 화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그 자리에 굳건히 서있는 여섯 개의 기둥은, 실제 미주리 대학에 존재하는 건물과 기둥으로 프랜시스 쿼드랭글(Francis Quadrangle, 잔디 광장)에 그대로 남아있다. _저자주) 인생의 무한 반복되는 고통과 감정의 휘둘림 속에서 견고하게, 냉정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태도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짐작해 본다. '달빛 속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순수한 기둥들은, 스토너 자신이 받아들인 사람의 방식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p.23)
이러한 삶의 방식이나 태도는 스토너가 다른 동료들과 다른 배경을 가지고 세상을 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농부의 아들 스토너의 내면에 흐르는 '그의 마음속 깊은 곳, 기억 밑에 고생과 굶주림과 인내와 고통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거나, '무명의 존재로서 근면하고 금욕적으로 살다 간 선조들에게서 혈연을 통해 물려받은 것에 대한 지식이 항상 의식 근처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서사가 그렇다. (p.307) 이른바 스토아(Stoicism) 학파의 삶의 태도가 연상된다. 땅과 함께 삶을 일구어 온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그들만이 느끼고 판단할 수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 말이다. 땅은 무너지지 않는다. 비가 오면 젖고 겨울이면 얼고 봄이면 녹고 자연에 따를 뿐. 그래서 스토너는 농부가 땅을 일구듯이 자신의 문학을 묵묵히 일구어 나간 것이다. '공부를 출세나 부귀영화의 수단으로 삶지 않는' 그런 태도가 스토너의 삶의 방식이었다고 짐작한다.
*모든 이미지는 본인 창작 제미나이 생성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