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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 사는 로젠 Nov 17. 2023

01_ 삶의 좌표가 겹칠 때

 2003년 여름 소나기 

       

   2000년대 초에 2호선 이대역 근처에 아이하우스라는 어학 스터디 카페가 있었다. 이른바 원조 논쟁이 벌어진다면 나는 지금 외국어 스터디 카페 시조는 여기였다고 말할 것이다. 이 카페는 서울에서 발행하는 영자 신문에 소개되기도 하고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월간 잡지에 자주 실리기도 하였다. 요즘에 비유한다면 핫플레이스인 셈이다. 카페에서는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등 각종 외국어를 공부하는 모임이나 관련 프로그램들이 있었고, 특히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알려주는 동호회가 있었다. '한글사랑'이라는 명칭을 가진 이 모임을 통해 누구나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알려주는 자원 활동을 할 수 있었다.

    2003년 8월, 소나기가 한 차례 지나간 여름 한가운데였다. 나는 토요일 오후에 이 언어 교환 카페를 처음 방문하였다. 이대역 2번 출구에서 직진으로 올라가다가 대학 정문에 이르기 전에 왼쪽으로 꺾어 약간 경사진 길로 내려간다. 무작정 내려가다 보면 지나치기 일쑤였던 카페로 돌아 들어가는 좁은 입구는 하얀색 벽이었다가 나중에 게스 청바지를 입은 엉덩이 광고판이 이정표를 대신해 주었다. 3층짜리 일반주택이었던 건물 1층에는 미용실이 있었고 카페는 나무 계단을 통해 올라가서 2층이었다.  폭이 좁은 나무 계단은 중간쯤에 한번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고,  입구의 천정이 낮아 키가 큰 사람들은 마지막에서 두 번째 계단쯤에서 카페의 문을 열어야 했을 것이다. 카페의 마룻바닥은 오래된 나무였는지, 사람들이 신고 있는 신발에 따라 각종 소리가 났다.

   우리가 촌장님이라고 불렀던 카페의 주인  카운터에 선 채로 한국어 동호회 가입하고 막 돌아서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입구 카페 문이 조금씩 열리며 누군가 들어오려 하였다. 카운터와 카페 입구 사이로 안쪽으로 열리는 문이라 내가 뒤로 물러서자 사람보다 콧날이 먼저 보였다. 풋.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키가 커서 한 번에 들어오지 못하고 얼굴부터 엉거주춤 들어오는 중이다. 슬로비디오처럼 들어온 사람은 오래된 주택의 낮은 천정에 머리가 닿을 듯한 외국 사람이었다. 이 느린 화면은 20년이 지난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물러선 김에 그 외국인도 나처럼 카운터에서 촌장님과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았다. 누구를 닮은 듯한데... 아 약간 젊은 날의 니컬라스 케이지_영화 <애리조나 유괴사건>에 나온 모습말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갑자기 니컬라스 케이지를 만난다는 것은 일생일대의 대사건 아니겠어!

     영자신문을 오려서 들고 온 그와 촌장님이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 말고 뒤에 서있던 나를 가리켰다. 그가 뒤돌아 보았고, 상황을 알아차린 나는 엘마 이후 대망의 나의 첫 번째 외국인 학생에게 손을 들어보았다. 어쩌다 각자의 시간과 공간의 움직임이 딱 겹쳐서 그와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되었다.

                             

 뉴요커라고_


       탁자에 마주 앉아 내가 ‘언제 한국에 오셨어요?’라고 묻자 그는 나를 쳐다보지 않고 종이를 들여다보다 얼굴을 창문 쪽으로 돌렸다. 자고로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받으면 딴짓하는 것은 동서고금 반응이 다 같구나라고 생각하며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창밖 멀리를 보며 초조한 듯 손가락으로 턱을 긁으며, ‘언제?’ '언제...'라고 발음하면서 무슨 뜻인지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한국에’와 ‘오셨어요’는 알아들은 것 같다. 그도 그날 한국어 수업을 신청하러 오자마자 담당자가 정해지고 갑자기 한국말로 레벨 테스트를 한다니 얼마나 부담스러운가.
    그 자신도 이미 알고 있던 쉬운 말인데 대답이 즉시 나오지 않아서 당황한 눈치였다. 나도 길 가다 외국인이 길을 물을 때 쉬운 영어 한마디가 생각나지 않아서 난감한 순간이 여러 번 있었으니 그 심정 잘 안다. 이렇게 ‘캐주얼한 클래스’에서 갑자기 인터뷰라니. 보통 학교 정규 수업에서도 첫 시간은 안면이나 트고 하는 건데 말이다.  나는 레벨 테스트 종이에 내가 알아서 나머지 항목에 체크를 죽 해버렸다. 초급 1단계. 어딘지 모르게 1초 니컬라스 케이지 느낌, 또 어딘지 모르게 누굴 닮은 듯도 한 그가 '끝?'이라는 표정으로 나를 스치듯 바라보았다. 나는 예스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제야 그는 숨을 쉬는 듯하였다. 말은 한국어로 하면서 종이에 다음 주 몇 시에 만나서 공부할 것인지 적어주었다. 그는 알아들었다는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의 어디선가에서 갑자기 책을 한 권 꺼내서 보여주었다. 그때 그 책은 어디서 나왔을까.  A5 정도 크기의 미국에서 발행된 한국어 교재였다. 그는 한국어 자모를 이미 익혔고 책의 처음 몇 장은 공부한 흔적도 있었다.


    카페를 나와서 같이 근처 인쇄소로 갔다. 수업은 매주 토요일 2시에 한 번에 2시간이었다. 서로 간의 사정이 있으면 매주 안 만나도 된다. 이런 ‘부담 없는 수업’에서는 그냥 만날 때 그가 들고 온 책에서 질문이 있으면 받아주고 하면 되긴 하였다. 그렇긴 해도 짧은 시간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가르치는 사람이 그 수업을 얼마나 준비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나는 서울에서 구입할 수가 없는 책이라 필요한 부분만큼 복사본을 가지기로 하였다. 장황한 설명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는 내가 간단한 영어로 복사가 필요하다 하니 바로 이해하였다.

   복사비는 800원이었다. 내가 돈을 내겠다 하니 그가 나를 내려다보면서 “왜 네가 내니?"라고 영어로 물었다. (왜 당신이 복사비를 내요?) ‘그럼 너가 내든 지’. 나는 올려다보면서 눈으로 말하였다. 예의상 물어보는 거야는 영어로 어떻게 말하나 그런 말이 있는 문화는 아닐 것 같은데. 장수를 세는 직원을 바라보며 이런 말들이 머릿속에 솟아올랐다. 거스름돈을 받고 책을 돌려줄 때 그는 잠깐의 내 표정에서 나의 생각을 읽은 듯 “다음에는 내가 근무하는 곳에서 복사를 해 오겠다”는 것이다. “너를 위해!(For You!)”. 공교롭게도 나는 You와 발음이 같은 Yoo 씨인데. 이 친구가 그 점을 노린 말인가? 독심술이 있나 뭘 좀 아는 건가 하는 또 마음속 중얼거림이 가득한 채 올려다보니,  '으흥' 하는 체스처를 취하며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는 약간 웃음이 나왔다. 내가 한국에 언제 왔느냐고 물어보았을 때 마주쳐야 했던 시선이 복사비 800원에서 이루어졌다. 복사비 800원이 언어의 장벽을 깼다.



            

    인쇄소에서 나올 때 다시 소나기가 내려 담벼락에 잠시 나란히 서 있었다.  말없이 서 있었다. 덕분에 그나 나나 이런 갑작스러운 만남에 따른 긴장을 풀고 한숨을 돌렸다.  이런 비를 소나기라고 부른다고 알려줄까 하다가 말았다. 소나기는 영어로 샤워(shower)다. 어감이 하늘과 땅차이다.  




    2003년 8월 9일 토요일, 그저 평범한 맹숭맹숭한 오후였다. 뉴요커라는 그는 미국식이름이나 체코 이민자 집안의 3세(?)였다. 영어 초급자와 한국어 초급자의 20년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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