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시간을 야금야금 먹어버리고 있다
‘소모’는 써서 없앤다는 뜻인데 그러면 감정의 소모라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감정이 써서 없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아무리 온갖 감정을 갖다 써도 여전히 진득하게도 바닥에 붙어있는 이 감정은 어디서 연유한 것인지 모르겠다. 다 쓴 줄 알았는데, 다 쓰고 이제 새로운 감정을 담을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바닥을 볼라치면, 박박 긁어내서 보기만 해도 아팠던 기억이 떠오르는 그 모양새로 새로운 감정의 의지를 끈질기게 거부한다. 그 거부의 몸짓은 가끔 너무 격렬해서 다시금 ‘소모’라는 단어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하며 기껏 소모했다고 믿은 감정이 도로 채워지는 ‘밑부터 차오르는 독에 물 또 붓기’를 경험하게 한다.
왜 이 감정이 이리도 오래 나한테 머무르는지 이해하지 못해 물어보려 해도, 물어보려는 사람에 대해 너무 잘 알아 물어볼 수 없다.
그 사람 그 자체에 대해서 나는 작아질 수밖에 없고 그 사람도 나에 대해서 작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모두 작디 작은 소시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또 우리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소모를 하되 소모하지도 못한 채 계속 이렇게 감정과 뒤엉켜 밍기적거릴 뿐이다. 일단은 그냥 나는 다 이해한다고, 나는 다 괜찮다고 살살 덮어보지만 말 그대로 시원치 않게 살살이라 결국은 어떤 차이도 만들지 못한다. 내가 다 이해한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해도 어쩔 수 없기에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이고, 나는 괜찮다는 말은 내가 괜찮지 않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기에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다. 너 역시도 이럴 것을 알고 너 역시 내가 이런 것을 안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아는 건 오로지 우리뿐이라 결국 우리의 감정이 아닌 시간만 소모할 뿐이다. 감정은 그냥 남아 우리의 시간을 야금야금 먹어버리고 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다가도 문득 터져 나오는 감정의 영악함을, 마치 용기 없는 나 대신 영악해지는 것 같아서 나는 그를 마냥 비난할 수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너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언어로, 그것도 한껏 꼬아가며 덮고 또 덮어버리는 것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