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남지 않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세상 모든 것은 한정되어 있기에 무언가를 포기할 수밖에 없고 그 포기는 너무 당연하지만 그로 인해 느끼게 되는 감정 자체는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기에 너무 많은 의미를 가진다. 그 많은 의미에 막혀서 갑작스레 한없이 무기력해지고 모든 게 귀찮아지는 시점이 오곤 한다.
이유야 많겠지만 어느 것 하나 명백하고 딱 떨어지지는 않아서, 그 애매모호함을 설명하기도 귀찮아서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우울하다"라고 말하곤 하는 것이다. 마치 들판에 있는 꽃의 이름을 다 알 수도 없고, 다 알아내기도 귀찮아서 그냥 "들판에서 이름 모를 꽃들이 흔들리고 있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애써 밝은 척하고 활기찬 척 하다가도 그 애매모한 것 하나가 튀어나와 생각을 잠식하면 끝내 다시 우울해지는 시점이 오곤 한다. 오곤 한다. 오곤 한다. 끝의 말을 의미없이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노곤해지는 시점이.
원래 '포기'라는 단어 자체도 싫어하고 어떤 식으로의 포기는 다른 방향으로의 도전이라고 여기면서 그 단어를 외면해왔는데 정말 포기라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는 것 같다. 머물러있기 위해서 흐를 수 없고, 떠나기 위해서 남을 수 없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되돌아보지 않지만 되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후회는 어쩔 수 없다. 어떻게 포장을 하든지 상관없이 그 포기는 그냥 포기 그 자체일 뿐이다. 이렇게 포기로 인한 무기력하고 우울한 감정을 담아둘 수 없어서, 담아두기를 포기했기에 또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이다.
어느 것 하나를 포기하면 다른 것을 선택하고 그 선택으로 인해 조금이라도 홀가분함을 느꼈었는데 그냥 그 홀가분이 너무 가벼워서 날아가버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