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아인 Oct 21. 2023

백 년도 안 된 태초의 폐허

_라투레트 수도원


아직은 오후의 여명이 남아 있어서 성당과 경당에 빛이 스며들었다. 이토록 깊은 고요, 이토록 깊은 어둠. 바깥세상과 아무 상관없이 이곳에는 고요와 어둠이 있다. 모든 침묵을 이곳에 모아두기라도 한 것 같다. 수도자들은 이 침묵의 밀집에 물든다. 덩달아 침묵을 익힌다. 침묵에 물든 영혼이 누리는 풍요를 구하는 시간. 전제조건은 물드는 것이다. 잠잠해져서 덩달아 침묵이 된다.    

 


소성당은 땅과 바짝 붙어 있다. 이제 보니 그렇다. 정체를 몰랐던 가장 먼저 만나는 외관이 소성당이었다. 그리고 성당은 바로 옆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것도 몰랐다. 모른 채 기묘한 형태의 종탑을 사진 찍고 그 외벽을 타고 내려와 달팽이처럼 붙어 있는 또 기묘한 형태의 원뿔을 찍었다. 그것이 소성당의 빛의 사다리였다.



원초의 빛만이 어둠에 물든 성당은 높다. 한없는 상승. 허공이지만 야곱의 사다리다. 그냥 우리 영혼이 저 빛을 따라 천상의 전례에 함께한다. 천사들의 전례가 지상에 임한다. 무엇도 걸리적거리지 않는다.      



폐허란, 뭔가 있었던 것이 사라지고 낡은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사람이 만들었던 뭔가의 흔적이다. 사람이 만들었던 형태와 기억들이 풍화된 자리는 다시 원초적이 된다. 태초와 닮아진다. 창조의 순간과 닮아가는 것보다 품위를 입는 것이 있을까? 그래서 그 순간은 영원에 주파수가 맞춰진다. 라투레트의 건축, 성당은 거의 폐허로 보였다.

르코르뷔지에는 애초에 폐허를 지었다. 창조된 순간의 무질서와 거칢을 지었다. 많은 것이 부족하고 불편하고 아직 스산하고 서로에게 기대야 하는 순간을 지어놓았다. 혼자서는 외로워서 견디기 힘든 공간을 지었다. 수도자들을 위한 공간을. 

본질. 르토로네수도원에서 발견할 수 있으리라던 본질은 창조의 순간 만나는 그 무엇이었을까? 폐허였을까? 시간의 흐름에 낡고 마는 사람의 수고를 미리 배제하고 지어놓은 태초의 숲, 그 안에 수도생활이 지향해야 할 본질을 담아보고자 했던, 그런 것일까?




건축물, 특히 종교적 건축물은 건축가의 철학이 배인 곳이다. 그걸 조금이라도 따라가 본다는 건 결국 한 사람의 고독과 고민과 수고와 묵상 혹은 명상을 들여다본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곳에서의 시간이 종교적 체험으로 이어지기를 희망하며 지었을 수도원이 어제오늘 세워진 게 아니라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지금은 많은 변화를 겪어오며 다양한 시도도 전개되는 중이지만 당시의 수도원은 여전히 가장 엄숙하고 거룩한 침묵의 집, 들어서면 많은 성인성녀와 무수한 성경의 이야기 속에서 뭔가를 만나고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의 집이었다.    


라투레트 수도원 역시 당연히 수사들을 위한 곳이다. 그런데 이 수도원에는 전통적인 어떤 장치들이 별로 없다. 그러니까 나는 그저 '폐허'를 보았다. 충일한 폐허,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간 폐허. 과거의 성당은 학교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성당에 가득한 성화를 통해 성경과 교리를 배웠다. 이제 현대의 수사들은 이미 성경과 신학을 공부한다. 딱히 성화를 통해 배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수도원 건축은 옛날 같으면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었겠다. 사도 바오로가 어린 아이였을 때는 어린아이에게 맞는 방법이 있다고 한 것처럼 적절한 교육방식도 필요한 법이다. 



..... 춥고 배가 고팠다          

억지를 부리는 건 아니었을까? 워낙 걸작이라고 하고 아주 빠른 기간에 유네스코문화유산이 됐다고 하니 그 명성에 공감하는 시늉을 하고 싶은 건 아니었을까. 시시각각 다가오던 낯섦을 가만히 돌아본다. 서늘했다. 가을 오후 빛이 사그라지던 시간 들어선 돌집에는 온기가 별로 없었다. 밤에는 아주 많이 추웠다. 가을이어서 설마 쓸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원체 한기에 취약해서 챙겨간 핫팩을 몸에 붙이고서야 잠이 들었다. 하얀 치장벽토는 질감만큼이나 스산했다. 




수도원에서의 하룻밤은 요구하는 게 거의 없었다. 누구에게든 몇 평 남짓 방 하나가 주어졌고 완벽한 자유가 허락됐다. 잠 못 이루고 서성이는 일도 가능했다. 텅 빈 복도의 어디쯤 중정으로 나가는 육중한 문이 열렸다. 그래서 밤의, 새벽의 수도원 중정에 홀로 머물기도 했다.

 






수도원 입구에서 숙소로 들어가는 철문. 문이 얼마나 무거운지, 그리고 닫히는 소리는 또 얼마나 크든지. 


수도원 입구


아침 수도원. 불빛 환한 방은 누군가 하룻밤을 머물고 있다는 뜻이다.


밤의 한기도 그랬지만 먹는 것도 정말 심각했다. 어디 가서 못 먹었다는 말을 거의 안 하는 편인데 라투레트 수도원 아침은 정말 먹을 게 없었다. 배가 고플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게 수사들의 식사였을 것이다. 



내가 허방을 쫓아왔다는 것, 내 동경은 말뿐인, 생각뿐인 도피 같은 것이었다는 걸 새삼 알아차렸다. 좀 쓰라렸다. 마른 빵과 쓴 커피. 건조한 일상. 일렁거리는 고요. 

내가 바랐던 것이 얼마나 무력한 허세였는지, 겨우 저녁과 아침식사에 뭘 먹을 수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이렇게 허기에 시달리다니.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제대로 궁핍을, 배고픔을, 결핍을, 가난을, 겪은 셈이었다. 

          


라투레트 수도원의 셀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건 개인에게도 요청되는 무엇이다. 시작을 상기하라. 돌아갈 일을 생각하라.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산다는 게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쓸데없는 고뇌 따위 떨쳐버리고 가벼워져서, 생명을, 존재를, 감사하며 떠나라. 





이전 25화 파격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