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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인 Oct 22. 2023

성령이 머무는 영원의 언덕

_베즐레

성령이 머무는 영원의 언덕

“성지를 탈환하라!”

예수가 묻혀 있는 예루살렘이 ‘이교도’인 이슬람 세력에게 정복당했다.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어떻게든 되찾아야 할 왕국이었다. 십자군은 순결한 종교적 열정으로 시작되었다. 사실 십자군은 동방교회에서 제기한 문제였다. 세기말이 지나던 무렵이었다. 1095년 피아첸차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노2세를 만난 비잔티움 제국 사절들은 이슬람으로 인해 겪고 있는 고통을 토로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순수한 열정으로 시작된 제1차 십자군이 끝난 지 50여 년이 지났다. 십자군이 세운 네 개의 국가 중 에데사 백국이 멸망했다. 충격에 빠진 유럽에서 다시 십자군 출정이 촉구됐지만 각자 처한 사정들이 있어 반응은 뜨겁지 않았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좀 달랐다. 1146년 베즐레의 언덕으로 프랑스 왕 루이7세와 당대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제2차십자군은 프랑스에서 불길이 타올랐다.


제1차 십자군 출정 때 우르바노2세는 “명예나 돈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과 그 나라를 위해 헌신하기 위해” 모여든 이들에게 대사를 수여했다. 중세 사람들에게 죄의 용서, 대사는 생명처럼 소중한 기회였다. 당시의 평신도들에게 구원은 멀고도 어려운 것이었다. 수도원에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속죄하고 그리스도와 교회를 지키기 위해 떠났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그분을 섬기려는 열망이 그들 안에 타올랐다. 그들에게 십자군 참여는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십자가를 지는 행위였다. 속죄와 참회의 행위였다. 선의와 사랑의 행위였다. 그것은 자신을 구원하는 중요한 기회였다.



성당에 들어섰을 때 미사가 진행 중이었다. 그렇잖아도 음향이 아름답다는 얘길 들었던 참이라 이 성당의 소리가 궁금했다. 로스트로포비치가 평생 마음에 드는 음향을 만드는 공간을 찾다가 예순이 되었을 때 "바로 여기"라며 바흐의 ‘무반주협주곡’을 녹음했다고 한 곳이다.


성당에 들어서자 내가 한 알 모래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사소한 존재 같았다. 성당이 거대하고 깊었다. 신랑은 로마네스크 건물로 어둑한 돌의 집인데 저 깊숙이 제대는 새하얀 고딕 양식으로 더 높고 더 환했다. 저 안쪽, 태양이 뜨는 동쪽의 내진에서 미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수많은 기둥과 수많은 기둥머리 장식과 말굽무늬 궁륭 아래로 걸어 들어갔다. 미사가 끝난 후 돌아본 내진은 또 다른 세계였다. 참 다양한 요소가 조금씩 다른 빛깔로 성당을 이루고 있었다.      


유럽의 성당에 가면 많은 ‘예술 작품’을 만난다. 성경의 무수한 이야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예수성심부터 성모마리아와 성 요셉, 그리고 무수한 성인들의 조각상과 부조와 프레스코화들을 본다. 그 성상과 조각과 성화들은 그 자체가 성당의 역사이고 마을의 역사이다. 베즐레 ‘생트 마들렌 바실리카’도 그렇다. 여기엔 당연히 마들렌, 마리아 막달레나의 조각상이 있다. 그리고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가 새하얀 조각상으로 서 있다. 시토회를 개혁한 신비주의자, 그가 이곳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이곳에 와서 사람들의 마음을 뜨겁게 고무했다.     



1146년 부활절, 베즐레 들판에서 제2차 십자군이 출정할 때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전사들에게 “그분은 항상 당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아시고, 당신을 돕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자신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에게 죄 사함과 영원한 영광에 대한 보상을 주고자 하신다”라며 고양했다.


천 년 전 베즐레 마을에는 드높은 열정이, 자신을 구원하려는 갈망이 꽃처럼 피었다. 하지만 전쟁은 참담하게 끝나고 베르나르도는 너무나 상심했다. 그는 심장이 찢어지는 슬픔을 겪었다. 왜 거룩한 의도가 실패를 겪은 것인가. 왜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하는가. 전쟁의 결과는 그의 죽음을 재촉했다.

    

십자군 출정을 독려할 만큼 그는 영향력이 큰 사람이었다. 그는 교황과 왕들의 조언자였고 신앙의 옹호자였다. 그는 놀라울 만큼 역동적으로 활동했다. 그 바탕에는 당연히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사랑이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수도원을 다시 개혁했다. 원래의 지향처럼 수도 공동체를 되살렸다. 그는 비가시적인 신비 속에 살았던 것 같다.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 영원한 복락과 아름다움을 잊지 않고 살았던 것 같다. 특별히 그는 성모마리아를 무척 사랑했고 찬미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언어로 마리아를 노래했다. 그가 베즐레 바실리카 측랑에 서 있다. 살아생전 늘 스스로에게 던졌다는 질문을 오늘은 내게 던진다. “너는 무엇 때문에 여기 있느냐(Ad quid venisti)”     


그날의 출정식 때문에 베즐레는 더 유명세를 탔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유해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미 한 세기 전부터 무수한 순례자들의 발길이 이어지던 곳이었다. 성인의 유해가 안치된 곳은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로 출발하기에 앞서 마땅한 준비를 하기에 더할나위없이 좋은 곳이었다. 베즐레에는 거룩한 지향으로 오가는 무수한 발길이 이어졌다. 그렇게 거룩한 의미가 있는 곳에서 십자군이 성지를 찾으러 뭉친 것이다. 아마도 베즐레의 영화로운 시간은 거기까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프로방스에서 ‘마들렌의 유해’가 발견되면서 영광이 쇠락했다.







아름다운 미사에도 함께했지만 나르텍스를 보지 못한 건 아쉬웠다. 보기 드물게 넓은 나르텍스에서 성당으로 들어가는 중앙문에 성령강림을 새겨놓은 팀파눔이 있는데 공사 중이어서 곧장 신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놀라운 장면 아래 서면 새삼 성령이 내게 오시는 걸 더 느낄 수 있기라도 했을까? 그날,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 두려움에 사로잡혀 지내던 사도들에게 ‘불길 같은 혀들이 갈라져 각자 위에 내려앉았을 때’ ‘마른 뼈들에 숨이 불어넣어져 살아났다.’ 사람을 살리는 힘, 목마른 사람이 마시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성령이 그들에게 오셨다. 그날처럼 베즐레에도 성령이 임하여 거룩한 열정에 사로잡힌 이들의 환호가 언덕에 뜨거운 불꽃으로 피어났다. 그런 열정, 그런 간절함을 구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마들렌의 유해가 모셔진 지하 성소는 어떤 품 같았다. 부드러운 빛깔의 돌들이 부드럽게도 매만져져 부드럽게 두 팔 벌린 품 안에 안기는 기분이었다. 외롭고 추위에 떨던 누구든 들어서면 와락 부드러이 감싸안아줄 것 같은 공간에 마들렌의 유해가 창살 너머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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