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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인 Oct 22. 2023

그 기둥머리 장식

_베즐레


부활과 구원. 영원한 생명. 먹고 사는 일과는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이는 이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을 베즐레에서는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사랑이라거나 희망이라거나 믿음이라거나 그런 덕들, 가톨릭교회에서는 ‘향주삼덕’이라고 부르는 이 덕들에 대해서도.


분명히 사랑이나 믿음에 비해 희망은 조금 더 아득해보였다. 그런데 사랑과 믿음과 희망은 신을 향해 가는 사다리를 이어준다. 어느 것도 덜 필요한 게 아니었다. 베즐레에서는 특별히 희망을, 희망을 잃었던 사람의 불행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 순간에도 존재하는 자비,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기록을 보게 되었다.

날이 흐리다고 태양이 없는 게 아니듯 우리가 겪을 수도 있는, 우리가 맞닥뜨릴 수도 있는 하켈 드마, 그 바닥치는 불행의 순간에도, 슬픔의 순간에도 신의 자비는 변함없이 존재한다. 마음의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그 희망은 너무나 간절한 것 아니었을까. 말 그대로 교회는 단죄하고 상처 입히는 재판정이 아니라 사람을 낫게 하는, 다시 일어서게 하는, 영혼의 병원이어야 했으니까.





베즐레 바실리카에는 정말 많은 기둥머리 장식이 있다. 구약 시대부터 신약의 이야기까지 수많은 장면들이 성당을 장식하고 있다. 그 기둥머리 장식 가운데 예수를 팔아넘기고 결국은 고통스럽게 목숨을 끊은 제자 유다의 모습이 있었다.


가톨릭교회에서 '자살'은 가장 큰 대죄에 속한다. 모든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자살한 사람은 구원의 여지가 없다고 보았고 최근까지도 자살한 영혼을 위해서는 위령미사도 허락되지 않았다. 교회의 '법'은 그랬지만 물론, 실제로는 좀 다르기도 했다.

'사제들의 주보성인'인 아르스의 비안네 신부가 어느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남편 때문에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아내의 고해를 들었다. 그 부인은 남편이 지옥벌을 받으며 더 고통스럽지 않을까 걱정했다.



“부인, 그가 몸을 던진 다리와 강 사이에 하느님의 자비가 있어요.”


비안네 신부의 말을 프란치스코 교황이 전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결코 잊지 말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때 교황이 바로 베즐레의 기둥머리 장식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목을 매 혀를 내밀고 눈을 뜬 채 죽은 유다가 기둥머리에 새겨져 있어요. 바로 옆에는 마귀가 그를 데려가려고 준비하고 있고요. 그런데 반대쪽에는 착한 목자가 보입니다. 그는 유다를 잡아채서 어깨에 들쳐 업고 가는 중입니다.”


단어 하나, 어떤 의미의 조금 결이 다른 해석조차 이단의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던 13세기에 이 기둥머리를 장식한 조각가는 신비가이자 용감한 사람이었다고 교황은 말했다.


"우리 신학자 가운데 누구도 감히 공식적으로 말하지 못하던 걸 그는 말했어요.”



무수한 기둥과 무수한 기둥머리 장식이 베즐레에 있다.


나는 굳이 그 장면을 보고 싶었다. 더 아름답고 의미 있고 거룩한 장면들이 너무나 많았지만 그래도 꼭 이 장식을 찾고 싶었다.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천장 아래를 지나며 눈물과 한숨을 삼켰을까. 얼마나 많은 탄원과 호소로 매달렸을까.

그들은 이 놀라운 장식들이 전해주고자 한 말들을 얼마나 알아들었을까. 그들의 수고를, 그들이 주고 싶었던 위로와 조언을 알아듣고 싶었다. 알지 못하는 그가 새겨놓은 사랑의 말을 듣고 싶었다.


“하느님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희망을 놓지 않으신다. 그가 우리를 희⋅망⋅한다. 그가 (우리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사람이 만든 잣대로는 감히 잴 수 없는 신의 사랑을, 그 신비를 맛본 그가 전해주고자 한 말을 나도 듣고 싶고 전하고 싶었다.  


누군지 알 수 없는 그가 전해준 희망의 가이없음 앞에서 사실 난 처음으로 ‘희망’을 생각했다. 희망의 부재는 내게 참 익숙한 것이었다. 크고 작은 세상의 것들을 희망하지 못하자 신께도 무엇을 희망해보지 못했다. 떼를 써보지 못했다. 문을 두드리지도, 그를 귀찮게 하지도 못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청하고 탄원하고 요구해봐야 했다. 그렇게 안 하는 게 잘하는 일이라는 착각을, 그런 오만에 여태 빠져 살았다. 그런데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하는 하느님의 자비를 용기 있게 증언해 놓은 이 대성당 기둥들 사이에서 비로소 희망을, 희망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희망하지 않는 것은 유다의 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든 희망해봐야 한다는 죽비를 맞았다.





그런데 정작 이 기둥머리 장식은 사람들이 알아보기에는 좀 어려운 곳에 있다. 그다지 눈에 띄는 곳도 아닌데다 몇 미터쯤 위에 새겨져 있다. 고개가 아프도록 올려다보며 찾다찾다 못 찾아서 성당 관계자로 보이는 이에게 물어봤더니 망원경이 필요하냐고 물을 정도였다. 나는 망원렌즈를 가지고 왔다고, 괜찮다고 했다.


    


베즐레 바실리카에는 여전히 생생한 어떤 음성들이 있다. 모든 사라져간 것들의 뒤에 여전히 남아 있는 마음들이 있다. 마들렌도 베르나르도도 십자군들도 아득한 옛이야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남아 있는 마음들, 그것이 구원으로 이끄는 손길이어서, 자신의 생을 구하고자 분투한 사람들의 여정이어서, 머무는 잠시 그 순간이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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