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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인 Jun 01. 2023

늘 거기 있었구나, 변산바람꽃

미얀마에 가고 싶었던 건 소녀 때문이었다. 더 정확하게는 우연히 본 소녀의 사진 때문이었다. 볼에 다나카를 바른 단발머리 소녀가 무척 보고 싶었다. 변산바람꽃을 처음 봤을 때 꼭 그 소녀를 보는 것 같았다. 소녀는 참 단아했고 이 꽃도 정말 단아했다. 나는 여전히 아직 가보지 못한 나라의 소녀를 보듯이 변산바람꽃을 본다. 

변산바람꽃을 보러 여러 차례 수리산에 갔다. 때로는 막 피어나는 중이었고 또 언제는 떠나가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가장 멋지게 피어나는 순간을 만났다. 꽃은 늘 그렇게 피었다가 지는데 그 적절한 시기를 맞춰 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도 그날 꽃들 속에서 행복했다. 


변산바람꽃, 수리산(2017. 3. 14.)


이 작은 꽃들이, 사람 사는 세상의 요지경과는 상관없이 한철 무겁게 내려앉은 낙엽들 틈으로 빼꼼 얼굴을 내밀고 피어나는 걸 보며 그 옛날 이 마을에 살았던 사람들 생각이 났다. 186년 전 이 마을에 천주교 신자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박해를 피해 이 땅에서 담배를 키우며 먹고살았다. 김대건 신부에 이어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가 된 최양업의 아버지가 마을을 일구고 사람들을 모아 교우촌을 가꿨다. 원래 충청도 청양 다락골에서 남부럽지 않은 집안이었던 최경환 일가는 아들이 천주교 신학생으로 마카오로 떠난 후 무수한 고발 때문에 고향을 떠나 유랑해야 했다. 그러다 수리산 병목골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1839년 결국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최경환과 아내 이성례는 물론이고 젖먹이 막내까지 모두 일곱 식구가 옥에 갇혔다. 최경환은 곤장을 맞은 후유증으로 옥사하고, 아이들 생각에 잠시 배교했던 이성례는 다음해 당고개에서 참수됐다. 어머니 참수를 앞두고 최양업의 네 동생이 온종일 동냥해 얻은 쌀자루를 메고 희광이를 찾아가 “우리 엄마 너무 아프지 않게 한 번에 하늘나라로 보내주세요.”라고 부탁했던 이야기는 생각할 때마다 놀랍다. 


그들이 떠난 뒤 마을은 사라졌다. 1930년경 최경환의 무덤을 찾아 명동대성당 지하 묘지에 안치하고 최경환 일가가 살았던 집도 복원돼 성당이 되었다. 보이지 않는 세계, 참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예수를 따라 천국을 그리워하며 살았던 사람들의 시간이 여기, 수리산 성지에 있었다.  

가장 예쁘게 핀 변산바람꽃을 보다가 그때 최양업의 아버지도, 신자들도 이런 봄을 만났겠구나 싶으니 마음이 뭉클해졌다. 이 꽃들을 보며 창조주 하느님 생각에 행복한 마음이었겠구나 싶었다. 꽃이 오래오래전 혈육처럼, 친구처럼 반갑고 고마웠다. 

그들이 감수한 삶은 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 마치 출애급 전날 밤 히브리 백성들처럼 금세 또 떠날 준비를 한 채 살아야 하는 삶을, 그들은 왜 감당했던 걸까. 고되고 두렵고 내려놓고 싶은 십자가를 기어이 짊어지고 가도록 한 동력은 어떤 의미로든 사랑, 어떤 의미, 어떤 희망이었을 것이다. 보이지도 않고 잡을 수도 없는 존재가 내 안에, 온 세상 천지에 그득 그득 머무시고 세상 만물의 운행이, 그 질서가 그로 인한 것이라는 믿음이었을 것이다. 그의 사랑에 대한 확신, 그 사랑에 대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희망은 길고 깊고 어두운 겨울날, 꽃들의 희망과도 닮았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이 지나고 마침내 간절히 바라는 어떤 세상에 접어들 것이다.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우리의 본향으로 가자. 그곳은 꽃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꽃들이 온 곳, 꽃들이 돌아가는 곳. 우리도 그리로 돌아간다. 영락없이 최양업 신부가 노래한 ‘사향가’가 들린다. 

“어화 벗님네야 우리 본향 찾아가세. 인간 영복(永福) 다 얻어도 죽고 나면 허사되고, 세상 고난 다 받아도 죽고 나면 그만이라. 아마도 우리 낙토(樂土) 천당밖에 다시 없네.”

마지못해 지키는 약속이 아니라 온전한 자유로 선택한 부자유. 완전한 복종. 완전한 희망. 사랑으로 가능한 그 희망의 노래가 수리산에 배어있다. 


변산바람꽃(금산, 2016. 3. 7.)

그 사랑을 알고 싶어졌다, 수리산의 꽃길에서. 생을 건 그 놀라운 믿음이, 그들의 마음이, 그들의 발자국이 배인 듯도 하여 수리산의 작은 봄꽃들이 더 사랑스럽고 애틋해졌다. 안녕, 기억을 품고 있는 꽃들아, 만나서 진심으로 반가웠어.


수리산에 깃들어 살았던 사람들, 그들의 생 역시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을지 누가 알까. 누군가의 빛나는 순간을 목격하는 일은 얼마나 놀랍고 행복한 일인지 꽃들을 돌아서며 또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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