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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인 Jun 01. 2023

숲속의 왕녀, 깽깽이풀

시샘하듯 꽃들이 피어나는 4, 5월에 인적 드문 산길 어디쯤 혹은 누군가의 무덤 가까이에서 이 꽃을 만나는 건 정말 행운이다. 아직 무채색 풍경 속에 깽깽이풀이 피어나면 문득 숲이 품위를 얻는다. 6-8장의 연보라색이나 하얀 꽃이 피어나고 수술과 암술 한 개가 드러나는데, 수술의 꽃밥은 노란색인 것도 있고 자주색인 경우도 있다. 꽃이 핀 후 뿌리에서 돋아나는 잎은 반으로 접힌 형태로 자주색을 띠며 올라오다가 점차 잎을 펼친다. 잎 가장자리는 부드러운 물결 모양으로 리드미컬해 보인다.


깽깽이풀, 가평(2019. 4. 20.)


깽깽이풀은 나무가 우거진 숲 속 햇살이 오가는 곳에서 잘 자란다. 숲속에서 자라지만 너무 우거져 빛을 못 받으면 낭패다. 빛이 잘 드는 숲 속 어느 정도의 여백을 배경으로 두고 피는 덕분에 눈부신 빛 속에서 깽깽이풀을 만날 수 있다. 

깽깽이풀은 개미를 이용하여 씨를 퍼뜨리는 개미살포식물이다. 꽃도 잎도 다 떨군 5월 말이나 6월 초가 되면 다 익은 열매가 벌어지는데 그 안에 든 씨앗에 엘라이오솜이라고 불리는 달콤한 밀선이 있어서 개미들을 유인하고 개미들의 자취를 따라 씨가 땅에 떨어져 번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깽깽이풀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얼핏 듣기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전해져 온다. 먼저 한창 모내기로 바쁜 철에 피어나는 까닭에 꽹과리를 치며 농사를 독려한 데서 깽깽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도 하고, 강아지가 이 풀을 먹으면 취해서 깽깽거린다고 하여 붙여졌다는 근거가 희박한 유래도 있다. 또한 우리 악기인 해금이나 바이올린을 낮춰 부를 때 ‘깽깽이’라고 불렀는데, 그 악기들의 선율처럼 이 꽃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아무튼 이 격조 있는 꽃무리를 바라보다보면 또다시 물어보고 싶다. 이토록 고혹적으로 우아한 꽃에게 '깽깽이풀'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는 무슨 생각이었는지를. ‘깽깽이'라는 단어의 어감이 조금 가볍고 부박하게 들리는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을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이 꽃은 마치 다이애나 스펜서가 묻혀있다는 고적한 호숫가 무덤처럼 어떤 신비로운, 조금은 쓸쓸한 처연함까지 풍기며 그 공간을 독특한 세계로 편입시킨다. 사람들의 세상에서는 조금 비켜나있는 조금 다른 세상. 실제로 깽깽이풀은 번잡한 사람들의 시간으로부터 살짝 비켜서 머물게 한다. 


그러나 깽깽이풀도 약탈자의 손길은 피하기가 어렵다. 예로부터 약으로 쓰이던 뿌리 때문에 약재상들이 캐가기도 하고 야생화를 판매하는 이들이 훼손하기도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편으로는 너무나 울창해진 숲이 깽깽이풀의 생장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지난해 봤던 자리에서 또다시 꽃을 보게 되는 건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는 행운이다. 꽃을 찾아다니는 일이 때론 슬픔의 길이 되기도 한다.     

 

깽깽이풀, 가평(2019. 4. 20.)


아름다우나 한없이 연약한 꽃, 

바람 불면 날아갈 것처럼 여린 이 꽃, 

너무나 짧은 시간 피었다가 홀연히 지고 마는 깽깽이풀은 

영원의 여정 안에서 

너무나 짧은 인생을 비춰주는 거울이기도 했다. 

그것은 자주색 종소리. 

오후였다. 

해가 기울어가는 시간, 

삼종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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