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찬란한 순간을 만나고도 인사 한마디 건네지 않는 건 참 야박하고 무정한 처사다. 홀연히 피어나 햇살 속에 혹은 어둠 속에 제 생의 시간을 걷고 있는 이 꽃들 앞에서 뭐라고 한마디쯤은 해야 한다. 처음 봤을 때도 그랬다. 사람 사는 마을의 낮은 산에 접어들었는데 순식간에 난초들의 마을이었다. 그들이 옹기종기 눈부시게 살아가는 마을에 내가 들어선 거였다.
난초는 홀로 피어나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새우난초 역시 그런 것일까. 어디선가 ’데메테르의 신발‘이라고 불렸다는 이야기를 봤는데 대지모신의 상징처럼 무수한 씨앗을 품고 있어서라고 한다. 수많은 씨앗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그만큼 후손을 남기기가 어렵다는 걸 알려준다. 생존을 위해 더 많은 씨가 필요한 것이다. 그토록 많은 씨에서 꽃들이 풍성하게 핀다.
인터넷이나 책에서 사진으로 보는 것과 내 눈이 직접 보는 건 정말 다르다. 새우난초의 경우도 확실히 그랬다. 사진에서는, 그 자잘한 꽃과 잎과 빛과 그림자가 엉켜서 혼란스러운 느낌이 컸는데, 실제로 만나니 꽃 하나하나가 참 앙증맞고 고왔다. 찍어온 사진을 확대하며 들여다보니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마치 씨앗에서 막 터져 나온 나비들처럼 경쾌하다. 꽃모양에서 새우를 찾아볼 필요는 없다. 이름은 뿌리줄기에 새우 등처럼 생긴 마디가 있어서 붙여졌을 뿐 꽃과는 관계없다.
내 컴퓨터의 바탕화면에는 올봄에 만난 최초의 꽃들 중 하나인 개별꽃이 피어 있다. 그런데 새우난초를 열어보니 개별꽃과는 다른 품위가 느껴진다. 꽃들조차도 이렇게 인상이 다르다는 걸 새삼 알게 된다. 한없이 청초한 소녀 같은 꽃이 있고, 농밀한 여인의 기품을 자아내는 꽃이 있다. 수백 수천의 꽃들은 수백 수천의 독특한 이미지로 다가올 것이다. 그 수백 수천의 꽃들이 어우러지며 봄은 더욱 눈부시게 찬란해진다.
"모든 작은 꽃이 장미가 되려고 하면 봄은 그 사랑스러움을 잃어버릴 거예요."(리지외의 테레사)
스스로를 ‘작은꽃’이라고 부른 프랑스의 가톨릭교회 성녀가 있다. 이 세상에서 한 송이 작은 꽃으로 피었다가 지는 것이 그의 최선의 사랑이었다. 같은 이름을 가진 콜카타의 테레사가 온 세상에 반향을 일으키는 삶을 산 것에 비해 프랑스의 테레사는 봉쇄수녀원에서 짧은 생을 살았다. 그는 일거수일투족에 하느님을 담고 살았다. 놀라울 만큼 거대한 일을 하는 이가 있고, 쉽게 드러나지 않는 일 속에서 세상과 사람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 그래서 이 세상이 균형과 조화를 얻는다. 봄날의 숲과도 같이 다채로워진다.
꽃을 만나며 작은 바람이 생겼다. 첫 만남의 설렘과 신선함을 오래 간직하며 어떤 꽃도 내 마음에서 배제하는 일이 없으면 좋겠다는. 오늘만이 아니라 시간이 많이 지나도 ‘오직’이라거나 ‘이것만’이라는 수식어는 쓸 일이 없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 난 여전히 애기똥풀도 좋아, 난 보랏빛 수국이 좋고 장미가 좋아. 저마다 제 몫의 생으로 피어나는 모든 꽃들을 있는 그대로 반길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꽃을 찾아서 산과 들을 헤맬 줄은 정말 몰랐다. 꽃을 만나러 다니기 전까지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사람일까, 다른 사람일까? 꽃도 사람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라는 걸 많이 생각하게 되는 고마운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