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모른다고 없는 게 아니다. 이 꽃들은 옛날부터 피고 져왔다. 나는 몰랐다. 당혹스러웠다. 멀고 깊은 산속만이 아니라 이토록 가까운 마을 뒷산에 이토록 무수한 생명체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걸 모르고 살아왔다니! 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꽃이 피고 지는 걸 모른 채 살아온 것처럼 알아야 할 뭔가를 모른 채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졌다. 그리고 물론 그럴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문득 유순해졌다. 내가 모르는 게 많다는 걸 알고, 그걸 인정하고, 그리고는 부드러운 눈매가 되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조언한 것처럼 ‘모른다는 걸 안다는 것’은 지혜의 시작인 모양이다. 혹은 겸허한 자세의 시작이거나.
홍천 깊숙한 마을에서든 충청도의 뒷산이든 앵초가 핀 숲으로 들어서는 순간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환희에 물든다. 그렇다고 유난한 것은 아니다. 언젠가의 화원으로 들어서는 듯처럼 자연스러운 길이다.
수없는 꽃에 감싸여 꽃을 찍고 있으면 시나브로 낯설어진다. 푸르른 산 속에 느닷없이 만발한 꽃들을, 내가 찍고 있다는 사실이 점점 낯설다. 나를 휘감고 있는 일상의 번잡이 홀연 간결해진다. 나도 자연의 일부가 되어간다.
앵초는 동서양에서 꽤 유명한 꽃이다. 그런데 서양에서 앵초라고 하는 프리뮬러와 우리 앵초는 외양과 색깔이 좀 다르다. 프리뮬러는 보라, 노랑, 빨강, 분홍, 파랑, 하양 등 여러 빛깔로 피는데 우리나라에는 분홍과 흰색 앵초만 보았다. 그마저도 하얀 앵초는 해가 지날수록 찾기가 어려워졌다.
골짜기 가까이 숲에서 고즈넉이 만난 앵초의 ‘당신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수줍은 고백은 매번 더없이 감미롭다. 개울가에서 처음 앵초를 본 후 나중에 태백산에서 큰앵초를 만났다. 앵초가 옹기종기 와글와글 사랑스러운 소녀들의 수다라면 설앵초는 고고한 은수자 같은 자세로 깊은 산 침묵 속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