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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인 Jun 07. 2023

부드럽게, 천진하게, 호자덩굴꽃

소나기가 쏟아졌다. 비는 서슬 퍼렇게 퍼붓고는 지나갔다. 이내 비 그친 하늘에 흰구름이 호자덩굴꽃처럼 피었다.

매화노루발 핀 안면도 바닷가에 들렀다. 비 그친 바닷가 둘레길. 나무와 풀냄새가 한결 진한 숲에서 매화노루발을 반갑게 만난다. 참 좋다, 당연한 일이다. 접근성도 좋은데 꽃도 지천이다. 누구에게 굳이 비밀로 할 필요가 없어서도 좋다. 더욱이 매화노루발은 멸종위기식물이 아닌가? 그런 꽃을 이렇게 마음 편히 만날 수 있다니 매화노루발의 미덕이고 안면도 해안의 미덕이다. 굳이 쉬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꽃이란 무릇 피고 싶은 곳에 피어나 스치며 발견한 이들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다. 감추고 걱정하며 노심초사할 존재가 아니었다. 우리는 꽃들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우려까지 해야 하는 땅에, 시간에 살고 있다. '내년에도 우리 만날 수 있을까?' 돌아서며 이런 마음으로 되돌아보게 되는 일이 슬프고 안타깝다. 마음껏 피어나는 꽃을, 마음껏 볼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호자덩굴꽃, 안면도(2020. 6. 13.)


푸른 봄 아직 초목이 무성하게 자라기 전에 들어섰던 숲이었다. 그 눈부시던 날에 우후죽순 피어났던 새우난초는 이제 그 자취만 남기고 스러졌다. 가고 또 오는 것! 한 세대가 가면 또 한 세대가 오고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코헬 1,4.9 참고)      

새우난초는 올해 피었고 지난해에 피었고 다시 새 봄에도 필 것이다. 봄날의 꽃들이 진 자리에 이제 새 꽃들이 피었다. 내가 찾아간 건 호자덩굴꽃. 보잇한 빛 속에 새하얀 꽃들은 흩뿌려진 진주알갱이처럼 작고 앙증맞은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솜처럼 푹신해 보이는 꽃에 솜털이 보송하다. 



꽃과 이름이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원래 호자란 ‘호랑이 수염처럼 길고 예리한 가시’라는데 이건 꽃과 잎, 열매 달리는 모습이 호자나무와 비슷해 붙여진 이름일 뿐 호자덩굴에는 가시가 없다. 일단 이름이 이 꽃에 적절하게 붙여진 게 아니다. 호자라는 말은 또 이슬람에서 설교자나 선생님을 가리키는 단어이기도 하다. 흙에 바싹 붙어 덩굴처럼 자라는 푸르고 작은 잎들로부터 새하얀 꽃을 피우는 이 꽃과 학식이 깊고 존경받는 ‘선생’의 이미지는 아주 안 어울린다. 오히려 호자 앞에 앉아 딴청 피우는 악동 제자들 같은 꽃이다. 이름들로 연상되는 여러 이미지들과 함께 이 꽃을 찍는 일이 더 즐거워진다. 시간이 지나자 고요하던 숲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냥 보기에는 하얗고 보드란 꽃, 호자덩굴꽃의 꽃말은 ‘공존’이라고 한다. 햇빛이 나무 사이로 들어왔다 스쳐가는 숲 속에 피는 꽃은 무수한 생명체 속에 존재한다. 그 자체로 함께 살아가고 있다. 


몇 해 전 새우난초를 보았던 나는 또 몇 해를 더 살았고 더 나이 들었고 ‘늙었고’ 어느 날 지는 꽃처럼 떠날 것이다. 꽃들은 한 해를 져도 다시 피어날 기약을 하지만 우리는 일회의 삶을 살 뿐. 이 순간의 만남이 그래서 더 따뜻하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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