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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인 Jun 07. 2023

그 숲의 보석상자, 금꿩의다리

금꿩의다리는 아라비안나이트에 등장하는 보물상자 같기도 하다. 한두 송이 가까스로 피는 게 아니라 흐드러지게, 정말 풍성하게 쏟아지듯 핀 꽃들이 갓 발견해 뚜껑을 연 보물상자처럼 눈에 부시다. 게다가 보랏빛이라니. 고귀하고도 신비로운 보랏빛 꽃잎에서 터져 나온 황금빛 수술이 화려하기 그지없다. 아니, 틀린 말이다. 보랏빛 꽃받침으로부터 꽃술처럼 반짝이는 것이 꽃이다. 


아마도 햇빛을 머금고 있을 땐 찬란의 극치일 것이다. 빛이야말로 꽃을 가장 빛나게 하니까. 하지만 비가 내리고 안개가 자욱해도 금꿩의다리는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함을 잃지 않는다. 오히려 그 색채가 더 제 빛을 발해 더욱 짙고 풍요로운 찬가를 부른다. 


처음 선자령에서 금꿩의다리를 본 날은 안개가 말도 못하게 자욱했다. 꽃이 피었다고 한들 안개 속에서 볼 수나 있을까 미심쩍어하며 걷는데 그 짙은 안개 속에 이 꽃이, 자태를 드러냈다. 순식간에 나타난 꽃에 조금은 넋을 잃었던 것 같다. 비현실적이었다. 그날 나는 환상 속에 꽃을 본 듯 했다. 그날 이후 금꿩의다리는 안개 속에 나타나는 행복한 선물 같은 것이 됐다. 선자령 그 안개가 환상 속의 꽃길이 되었다.


금꿩의다리, 대관령(2019. 7. 21.)


그 후 대관령에서 다시 금꿩의다리를 만났다. 간단없이 비가 내리는 도로 가에 화사하게 핀 꽃들이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비옷도 젖고 신발도 젖고 사실 온 몸이 비에 젖은 것 같은 상태였는데 길에서 조금 내려가니 아주 가는 개울에 졸졸 물이 흘렀다. 슬리퍼를 신은 발이 아주 개운해졌다. 차고 맑은 물에 잠시 선녀가 된 듯도 했다. 머리 위로는 금꿩의다리와 흰금꿩의다리가 가녀린 줄기에 보석 같은 꽃망울을 드리우고, 꼬마숙녀들의 유치찬란한 샤스커트 같은 꼬리조팝나무 꽃도 어둑한 숲을 밝히고 있었다.



흰금꿩의다리, 대관령(2019. 7. 21.)


비 내리는 날의 꽃숲에서 문득 눈부신 꽃들의 한순간을 만났다. 생의 반짝이는 한순간이란 그런 것 아닐까? 저마다, 저마다, 정말 자기 뿌리에서 힘을 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는 또 스러진다. 그 여정을 목격하는 경이의 순간, 숲에서 배우는 건 소멸의 의미, 고요한 소멸에 대한 성찰이다.      

모든 것이 빛날 수 없고, 빛나는 순간이 영속할 수 없다. 어느 날 내가 어둠에 물들면 그대가 내 삶에 등대가 되어주세요. 우리 그렇게 살아가는 거잖아요. 명멸. 반짝이다가도 때로 빛을 잃을 때 어둠 속에서 길을 잃지 않게 우리 서로에게 이정표가 되며 가요.     


숲은 가만가만 알려준다. 오늘은 나, 내일은 너. 빛을 발하며 피었던 어제가 지나고 이젠 소멸을 앞둔 것들과 여전히 아직 피지 않고 때를 기다리는 것들. 그 안에서 평온해지는 건 그게 자연의 이치이기 때문인 것 같다. 순리. 흐르는 대로. 받아들임. 받아들이며 의미를 찾아보는 일. 바로 그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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