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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 로지 Apr 11. 2018

봉천동 원룸의 반달이와 나

어느 해, 11월 즈음이었다.  


서울에 연고도 없이 홀로 유학 와서 어찌어찌 졸업하고, 이제 막 실 뿌리라도 내려 보려고 아등바등 살고 있는 어느 겨울 초입.  


운 좋게 들어간 회사에서 나는 막 교육을 끝낸 고달픈 신참 매니저였다. 북유럽에서 온 회사라서 그런지, 입사 후 처음 맞는 겨울은 여러 가지 의미로 매서웠고, 혼자 살고 있는 봉천동 원룸 집은 더 쓸쓸했다.  


매니저 승진 후 발령이 나면서, 나는 그나마 정이 들었던 동네를 떠나왔다. 사실 혼자 사는 원룸이 여기면 어떻고, 저기면 어떠랴 싶은 마음에 훌훌 떠나 왔지만, 익숙한 길, 시장, 지하철역 주변 그리고 오며 가며 만나는 몇몇 지인조차 그리워지고 있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생각한 일을 행동에 옮기기로 했다.  


다른 ‘생명’이랑 함께 사는 것,  
내 작은 원룸에 나 말고 숨 쉬며 살고 있는 존재를 만드는 일


개나 고양이를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금방 생각을 접었다. 개는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우울증에 걸린다는 말에, 그리고 고양이는 별 신경 쓰지 않아도 잘 살 것이라고 쉽게 생각했다가 큰 코 다친 여러 집사님들의 이야기를 읽었기 때문이다. 식물은 아무래도 좀 심심하기도 하고, 결국은 어렸을 때 집에서 길렀었던 익숙한 물고기로 결정하였다. 


동묘 근처에서 친구와 커피 약속이 있었던 나는, 조금 일찍 나가 근처 수조관에 들렀다. 형형색색의 익숙한 금붕어들이 많이 보였다. 순간, 왠지 한 마리씩 작은 어항 속에 가만히 헤엄치고 있는 녀석들에게 눈이 갔다. 


사장님께 여쭈어 보니, 그 아이들은 ‘하프 문 베타’라는 외래종으로, ‘투어(鬪魚)’라고 했다. 소싸움, 닭싸움처럼 동남아 지역에서는 물고기 싸움을 한다고 한다. 화려한 수컷 녀석들은 물 안에서도 각자의 구역이 있고, 이 구역에 누구라도 들어오면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운다. 그래서 기를 때도, 각각 작은 어항에서 기르는 것이 주인도, 이 녀석들도 편하다. 

평화롭게, 그렇지만 작은 방에 사는 것과 같이 외롭게도 보이는 공간에 있는 점이 마음에 들어, 나는 한 마리, 무늬가 그중에서도 소박하고 화려하지 않은 녀석으로 결정했다. 동그랗고 작은 어항도 하나 사서 이 녀석을 넣어 주고,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날 밤, 나는 꼬리가 하얗게 반원 모양으로 펴지는 것이 하늘에 있는 반달과 닮아서 ‘반달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반달이의 봉천동 첫 날


그 이후, 나의 일상에 아주 작은 변화가 생겼다. 퇴근 후, 반달이에게 하루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기도 하고, 밥도 주면서 똑같았을 그 녀석의 하루도 살짝 물어보고. 내가 집에 돌아가 돌보아줄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에, 봉천동 집은 더 이상 혼자 있는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상의 변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내가 지어 준 반달이라는 이름은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나 보다. 이 녀석은 약 보름, 그러니까 정말 이름처럼 반 달 정도 살다 떠났다. 냉기가 있는 초겨울의 방 안이 동남아에서 온 반달이 에게는 너무 추웠나 보다.  나는 그때 '아, 이래서 비싼 돈을 주고 작명을 하고, 개명도 하나보다'라고 정말 생각했다.


반달이는 아무 데도 묻어 줄 흙이 없는 서울 봉천동 달동네 어느 구석에 나와 함께 살고 있었었다. 한 밤중에 발견한 반달이를 그대로 두는 것도, 당장 데리고 나가는 것도 나는 할 수 없었다. 나는 서글픈 마음을 부여잡고, 반달이를 다시 물로 돌려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빙글빙글 돌아 내려가는 반달이의 마지막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며, 미안하고, 고마웠다고 작게 말했다. 


유난히 긴 겨울 중, 반 달은 네 덕분에 혼자가 아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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