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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망해버린 한국식 BBQ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4일 차 팜플로나~푸엔테 라 레이나 24km

by 김로지


Camino de Santiago




까미노 데 산티아고.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하면 떠올랐던 풍경이 4일 차부터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끝도 안 보이는 밀밭, 유채꽃, 뜨거운 햇볕,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점점 길이나 마을, 숙소에서 반복적으로 마주치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슬슬 같이 다니는 무리가 구분되기 시작해 서로의 동행을 보고 누구는 어딨어?라고 물어보기도 한다.


우리는 이 길을 '작은 사회 (Small Society)' 혹은 모두가 한 곳을 향해 이동하는 '소셜 버블 (Social Bubble)'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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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네디언 바바라, 이탈리안 프란체스코와 어느덧 4일째 일정을 같이하고 있는 나. 생각해 보니 일출을 본 적이 없고, 걷는 길에 사람들이 많지 않길래 (특히 한국인이) 오늘은 조금 일찍 출발해 보자고 6시 30분에 기상했다.


베드수가 100개도 넘었던 Jejus y Maria 알베르게에서 서둘러 준비하고 출발하려는데 바바라가 'Rosie Checklist'라고 적힌 메모장을 들이밀었다. 하도 이것저것 두고 다니는 날 위해 만들었다길래 프라 (프란체스코)랑 웃다가 기절할 뻔했다. (스틱, 장갑, 모자, 물병, 삼각대, 재킷, 여행용 파우치가 적혀있었음)


회사에서는 나름 카리스마 있으려는 팀장이자 가정에서는 재무부장관 및 행동대장, 친구들 그룹에서는 리더 요직을 주로 맡는 김로지는 순례길 관심병사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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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일출은 놓쳤다. 숙소만 도착하면 한국인들이 참 많은데 자꾸 내가 걸을 때는 없다 보니 무언가 뒤쳐지는 느낌이 들었다.


대도시 팜플로나를 떠나기 전에 우회해서 도시를 조금 더 둘러보고 가자는 프라가 오늘따라 야속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오늘 24km나 가야 하는데 자꾸 여유를 부리니 마음의 여유가 하나도 없었다.


돌아보니 정해진 시간에 출근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걷는 것 밖에는 할 것 없는 이 순례길에서조차 왜 이리 마음이 조급했나. 첫날 남들보다 늦게 시작해 그 멋진 피레네 산맥을 즐겨놓고 고작 며칠이 지났다고 숙소 대란이니, 누구는 새벽 5시부터 랜턴을 켜고 출발했다느니 하는 얘기를 듣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바빠졌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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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화살표 방향대로 가는데 프라가 보고 싶었던 몇 군데를 둘러보러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게 탐탁지 않았던 것 같다.


'멀쩡히 회사 다니다가 순례길을 간단다. 심지어 남편도 없이 혼자 간다더라'는 소식에 모두가 놀라워했었다. 남편이랑 같이 가고 싶었지만 긴 휴가를 낼 수 없었고, 시간이 더 지나면 이런 경험조차 어려워질 것 같아서 결정했어요.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했던가.


정해진 루트대로 가지 않으면 특이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환경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나. 그게 어딘가 답답하다는 생각을 했으면서도 고작 몇십 분 돌아가는 것에 조급함을 느낀 나였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는 내 속도 모르고 저 멀리 프란체스코와 바바라는 어떤 성문에 서서 새 우는 소리에 각자 나라에서의 동물 소리를 흉내 낸다. 합류해 "꼬끼오"를 야심 차게 들려주니 웃겨 죽는 둘, 프라의 코커두를두가 더 웃기다고 한바탕 웃는데 좀 늦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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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를 빠져나가는 오늘은 걷는 동안 도시-마을-들판-유채꽃밭 등으로 풍경이 계속해서 바뀌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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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했던 순례길의 모습과 가장 닮아있던 오늘이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밀밭을 파란 하늘과 함께 걷는다. 윈도우 배경화면 속에 들어온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걷는 동안 자주 뒤를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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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오전부터 태양이 작열해 온다. 걷는 동안 태양은 늘 뒤에 있었지만 뜨거운 햇볕에 건조해서인지 콧물이 계속 났다. 난 비염도 없는데 왜 콧물이 나지, 휴지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다음에 온다면 꼭 작은 휴지를 챙겨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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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순례길 최고 로맨티시스트 할아버님을 처음 만났다. 배낭을 수레에 얹어 끌고 가시길래 저렇게 하면 편한가- 했는데 곧 수레를 두 손으로 끌고 가시던. 그 뒤는 할머님이 빈 손으로 따라 걷고 계셨다.


간간히 마주친 이 노부부는 할아버님이 수레 두 개를 끌고 가실 때가 더 많았다. 어느 도미토리에서 그 좁은 도미토리 침대에서 할머님을 꼭 끌어안고 자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남편 생각이 많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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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언덕 (Alto del Perdón)에 도착했다. 오늘의 출발지 팜플로나에서 약 1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이 언덕은 해발 770m로 나바라(주도)의 평원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다.


과거에 순례자들이 지은 죄에 대한 용서를 받는 장소이기도 했고, 언덕을 오르는 과정이 험난해 죄를 씻는 곳이기도 했단다.


개인적으로 엄청난 울림을 주는 곳은 아니었다. 고지대인만큼 바람이 너무 많이 불었고 순례자들의 모습을 형상한 철제 동상 옆에서 바바라, 프란체스코랑 같이 낄낄거리며 따라 하기 바빴다. 난 누굴 용서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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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언덕부터 엄청난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등산화가 아니었던 신발 밑창을 통해 울퉁불퉁한 돌의 감촉이 느껴지는 잘 닦이지 않은 길이었다. 내려오는 길에 핀란드 친구 얀을 만났다.


두 번째 까미노라는 그는 자주 예전 기억을 회상했다. 담벼락에 등산화로 만들어진 장식품을 보고도 '나 이거 생각나. 내가 4년 전에 왔을 땐-' 하며 예전 기억을 꺼내곤 했다. 우리는 그렇게 같이 우테르가 (Uterga)라는 마을에 도착했고, 잠시 바르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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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미국인 로즈 할머니와 함께 데이빗과 핏짜도 합류했다. 내 영어 이름이 로지라는 걸 알고는 사진을 찍자던 새빨간 중절모 같은 모자를 쓴 그녀는 혼자 떠나온 75세의 미국인이었다.


'로지라는 이름이 촌스러운 이름이라고 자주 들었다'는 내 말에 '75살인 내 이름이 로즈인 것만 봐도 그렇지. 그래도 요즘은 유행이 돌아오고 있어서 아기 이름을 로즈로 많이 짓는다더라'라며 위로해 주었다.


짧은 휴식 끝에 다시 길을 떠나 걷고 있는데 스틱을 두고 온 게 생각나서 또 다녀온 김로지였다.


20km가 넘게 걷고 오후 1시의 뜨거운 햇빛에 발랄하던 우리도 점점 말을 잃어간다. 마을은 언제 나올까 생각하며 묵묵히 각자의 길을 걷는다.


오늘만 약 7시간 넘게 이동했을까. 팜플로나에서 24km를 걸어 드디어 마을에 도착해 7유로 공립 알베르게에 체크인을 하는데, 프라가 이탈리안이라고 하니 호스피탈레로 (숙소 운영자 or 자원봉사자)가 고개를 젓는다. 알고 보니 흥 많고 말 많은 이탈리안, 조용해달라는 의미였다.


바바라와 프라는 슈퍼에 가서 먹을 것을 산다길래 지친 몸뚱이 편히 먹고 싶어 레스토랑에 가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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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씨에스타 (낮잠 또는 휴식 시간. 대부분의 스페인 가게들은 오후 2-5시경에 문을 닫는다.)로 인해 문이 열었나- 보고 있는데 똑같이 서성거리고 있던 마틴을 만났다. 그는 1일 차 론세스바예스에서 한국인과 동일한 그룹으로 분리된 대만인이었고, 잠깐의 통성명을 했었기에 함께 점심을 먹기로 했다.


대만의 IT대기업에서 12년간 일한 그는 일상에서 도망치고 싶어 회사를 그만두고 편도 비행기를 끊어 왔다고 했다. 다음 10년은 뭘 할지 고민해보고 있다는 그에게 늘 퇴사 이후의 공백에 대한 걱정이 있던 나는 대만에서 일 구하기 쉽냐는 질문을 건넸고, '일을 구하긴 쉽지. 근데 너도 원하는 일을 하고 싶잖아. 아니면 괜찮은 직업. 그게 어려운 거지'라고 대답한 마틴은 항상 모든 질문에 클리어한 답변을 내놓는 어른 같았다.


한국 출장 경험도 많고, 업계도 비슷했던 우리는 꽤 다양한 주제로 얘기를 나눌 수 있었고 언뜻 보면 한국인 같은 대만인과 영어로 대화를 지속하고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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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같은 숙소였던 우리, 바바라에게 마틴을 소개해주고 싶어 함께 잔디밭에 앉아 몇 시간 동안이나 발을 주무르며 대화를 나눴던 별거 아닌 이 시간을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나 - "잔디에 베드버그 없을까?"

마틴 - "베드버그는 베드에 있겠지."

바바라 - "슈퍼 다녀와서 빨래를 해놨는데, 어떤 새가 그 위에 똥 쌌어."

마틴 - "너 (김로지) 한국에서 김치 매일 먹어?"

나 - "매일 먹지. 모든 음식에 (나는 소문난 김치충이다.)"

바바라 - "황새야. 황새가 아이를 물어다 주었다는 이야기를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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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7시가 조금 넘어 이태리식 저녁과 캐나다식(?) 아침을 빚졌던 나는 마틴까지 포함해 한국식 BBQ를 선보이겠다며 모두를 끌고 마트로 갔다.


큰소리는 쳤는데 막상 도착하니 쌈장도 없고, 김치도 없고, 심지어 쌈도 변변치 않을 것 같아서 걱정하며 최대한 비슷한 걸 골랐고 괜찮은 띤또 데 베라노 (레드와인과 탄산수 혹은 탄산음료를 섞어 만든 주류)도 사 와서 요리를 시작하는데.....


코팅이 다 벗겨진 팬에 삼겹살을 굽느라 고군분투하다가 뒤를 돌아봤는데, '로메인을 씻어달라'는 내 주문을 받은 프라가 '잘 씻어서 샐러드처럼 조각조각 잘라'놓고 있다.


"프라!!!!!!!! 이게 뭐야!!!!!"

바바라 - "안 그래도 내가 로지에게 물어보라고 했어."

프라 - "나 디렉션을 못 받았어. 너가 씻으라며. 그래서 씻었어."

"그래 내가 씻으랬지 누가 자르랬냐!!!!!"

마틴 - "괜찮아. 대충 먹자"


쌈장은 칠리소스로 대체, 상추는 잘라진 로메인, 코팅이 벗겨진 팬에서 힘겹게 구워진 소금/후추 아무것도 간이 안된 삼겹살.


프라는 삼겹살 한 쌈 먹어보더니 곧바로 바게트를 집으며 너 한국에서 추방되라고 했다.






부엌에서 삼겹살을 더 굽고 있을 때에, 왼쪽에서 먹음직스러운 요리를 하고 있던 프랑스인 휴고를 만났다. 20대 초반의 휴고는 친구와 함께 백패킹을 하던 중이었다. 삼겹살이 많이 남았기에 그의 팬에 너 먹을래? 하고 고기를 넣어주려던 순간


"안돼! 나는 베지테리언이야. 마음은 고마운데 고기를 먹지 않아."


라고 했다.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을 처음 본 나는 적잖이 당황했지만, 그 이후로도 종종 마주친 똑 부러진 휴고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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