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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오롯이 혼자 걷는 순례길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5일 차 푸엔테 라 레이나~에스떼야 22km

by 김로지

Camino de Santiago




유부녀로서, 그리고 퇴사를 하지 않은 채로 떠나온 순례길은 마음 편한 여행길이 아니었다. 당장 아내 없이 한 달간 혼자살이를 해야 하는 남편은 물론 팀원들을 두고 한 달이라는 시간을 떠나 있는 것도 참 마음이 불편했다.


게다가, 종교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길이다 보니 준비 과정에서 주위 사람들이 많이도 생각났다. 해서 시간이 날 때마다 메모장에는 이름과 그 이를 위한 소원을 한 문장씩 써 내려갔다.


어느 날, 남편에게 순례길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하면 이 소원들을 빌 거야. 하며 보여준 메모장을 한참 보던 남편이 말했다.


"널 위한 소원은 없잖아."


한 달 만에 준비해 떠나기 위해 인수인계 리스트부터 여행 준비를 병행해야 했던 그 바쁜 시간 속에서도 나보다는 남을 더 생각했던 나였다. 힘든 직장 생활 속에서도 공황장애가 온 나보다도 팀과 조직, 회사를 더 생각했던 스스로가 안쓰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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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5일 차 오전 6시 30분 푸엔테 라 레이나의 공립 알베르게. 어제 망쳐버린 한국식 BBQ가 무색하게 바바라가 정말 맛있는 오믈렛을 만들어줬다. 프라와 함께 맛있게 먹은 후 7:30분 출발.


오늘따라 유독 컨디션이 더 좋지 않았다. 어느 알베르게나 숙소를 가장 먼저 나서는 건 대부분 한국인들이었는데 이 말은 준비를 누구보다도 일찍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오늘도 새벽 5시부터 안에서 양치질과 대화소리 그리고 불을 키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잠을 설쳤는데 한국말이 계속 들려 상당히 안타까웠다. 3일째 같은 일이 반복되니 바바라와 프라마저도 한국인들이 많으면 푹 쉬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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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엔테는 다리, 레이나는 여왕을 의미해 푸엔테 라 레이나 (Puente La Reina)는 여왕의 다리라는 의미를 가진 나바라 주도의 작고 예쁜 마을이다. 심지어 순례자들을 위해 다리를 지어주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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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페이스가 비슷한 바바라와 프라가 함께 걸어간다. 평소 운동 부족이었던 나는 5일 차가 되니 어깨부터 허리, 골반, 발목 등 안 아픈 곳이 없어 초반과 달리 둘을 쫓아가지 못했다.


그들을 앞세워 천천히 걷는다. 초반에는 속도를 맞춰 가주려고도 하고, 앞서 걷다가도 간간히 돌아봤기에 페이스에 방해되지 않도록 오늘 사진도 찍으며 혼자 걷겠다고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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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길에 적응되지 않은 몸도 몸이었지만 영어를 하루 종일 사용하는 환경이 점점 힘에 부쳐가고 있었다. 캐나다인 바바라와 워킹홀리데이 경험이 있는 프란체스코와 달리 한국 토박이 김로지는 이해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둘보다는 뒤쳐졌기에 의사소통에 많은 에너지를 써야 했다. 더 깊이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지친 몸과 함께 에너지는 고갈되어 갔다.


길에는 많은 한국인들이 있었지만 내가 택했던 상황이었다. 한국을 떠나올 때의 다짐처럼 완전히 낯선 환경에 나를 던지고 싶었기에 원했지만, 외롭기도 하고, 즐거우면서도 쓸쓸한 느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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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이나 돼서야 아무도 없이 온전히 혼자 걷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생각 정리가 필요하다고 떠나온 곳에서 친구들과 함께 그렇게도 행복해하더니 동시에 외로워하는 내 모습에 그림자가


"괜찮아. 여기 내가 함께 걷고 있어."


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는 친구들을 따라다니느라 어플을 보는 방법을 익힐 필요도, 표식을 보고 혼자 찾을 필요도 없었다. 새소리 말고는 고요한 길, 주위 풍경에 더욱 집중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서두에 적었던 일이 생각났다. 나를 잘 돌보고, 내 마음의 소리를 잘 들어주고, 아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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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 지 약 1시간 30분째, Maneru라는 작은 마을을 지나는데 앞에 바르가 보였지만 아침에 오믈렛을 든든하게 먹었으니 그냥 가자고 생각한 게 오산이었다. 체력 소모가 심하니 쉴 수 있는 곳에서는 여유롭게 쉬어가자.


KakaoTalk_20250309_144741888_06.jpg 혼자이니 이런 사진도 남길 수 있었다.



KakaoTalk_20250309_144741888_07.jpg 데레사와 페르난도



첫날 생장에서 코골이를 경고했던 그녀, 내 아랫 베드 데레사와 그의 오빠 페르난도를 만났다. 스페인 사람이었던 그들은 영어를 하지 못해 아쉽게도 소통은 할 수 없었지만 첫날부터 거의 매일 마주쳐 얼마나 반갑게 인사를 나눴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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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지에서 약 8km 정도 떨어지는 Cirauqui라는 마을에서 길을 헤매다 현지 분들이 도와주시기도 하고, 혼자지만 뚜벅뚜벅 열심히 걸으며 간간히 뒤도 돌아봤다. 새삼 내가 이만큼이나 걸어온 게 기특하기도 하고 앞만 걷고 다닐 땐 못 봤던 풍경을 파노라마처럼 볼 수 있었다.



KakaoTalk_20250309_145215492_05.jpg 근데 이건 어느 길로 가라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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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은지 세 시간째, 오늘 컨디션 난조에 혼자 걷다 보니 금방 컨디션이 떨어졌다. 숲 길을 지나다 쉬고 있는 네덜란드와 스웨덴 어머님들 옆에 주저앉아 빵을 먹는데 보자마자 한국인들이 도대체 왜 이렇게 많냐고 묻는다. 한국을 사랑하는 조카가 아르바이트를 하다 돈이 모이면 한국으로 떠난다는 얘기에 아주 흐뭇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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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rca라는 마을을 지나고 있을 때쯤 입간판에 '맛집'이라고 쓰여있는 바르가 있었다. 주스나 한 잔 하고 싶어 들렀더니 "어서 오세요." 하는 익숙한 한국말이 들렸고 스페인 분과 결혼해 알베르게와 바르를 22년째 운영하는 사장님이 계셨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오늘 7시 30분부터 걷기 시작한 내가 (한국인 치고) 왜 이리 늦게 걷는지 궁금하셨던 모양이다. 오늘 진작에 이 바르를 지나친 어떤 한국 분에게 식당에서 만난 네덜란드 사람이 '순례길에 가득한 한국인들 때문에 너무 불편하다.'라는 컴플레인을 한 것도 알려주셨다.


당장 오늘만 해도 같은 한국인인 게 창피할 정도의 에피소드를 겪었던 나기에 가만히 듣고만 있었지만 마음 한편이 너무나 속상했다. 우리는 왜 이 순례길에 와서도 빨리빨리 민족인 걸까. 이 길을 걷는 모든 한국 분들이 여행 에티켓을 잘 지켜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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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신기하게도 길에 사람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던 때, 며칠 전 만났던 미국인 데이빗이 로지! 하며 인사를 건네왔다. 캘리포니아 출신의 그의 본토 발음은 이해하는데 많은 노력이 필요했지만 혼자 걷는 게 좋은지 같이 걷는 게 좋은지 물어보니 '음, 그건 까미노가 정해주는 것 같아'라고 말해준 게 상당히 인상 깊었다.


종교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 본인을 'Jewish'라고 소개했는데, 평생 기독교나 가톨릭과 불교인들만 만난 나로서는 '유대인'의 영어 단어가 생소했다. 계속 못 알아들으니 '히틀러 알아?' 하길래 그때 알았다.


개발자인 데이비드 역시 유부남이었는데, 아내는 포르투길을 가고 싶어 하고 본인은 프랑스길을 가고 싶어서 (순례길은 다양한 루트가 있다.) 각자 걷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아니, 얘네는 남편 두고 혼자 떠나온 나보다 더 한 애들이잖아?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만나면 정말 로맨틱하지 않겠냐며, 아이를 갖기 전 건강한 몸과 마음을 만들고 싶어서 이 길을 택했다고 했다. 그러다 핀란드인 얀과 미국인 케일리까지 만나 함께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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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2시 40분,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 Estella (에스테야)에 도착. 아침 7시 30분에 시작해 22km만 걸었다 보니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이제 20km대 초반은 긴 거리가 아니다.)


다른 곳에 숙소를 잡았던 모두와 헤어지고 나는 바바라와 프라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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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테야 시립 알베르게 도착! 베드 정리하고 샤워하고 빨래하는데 데레사와 페르난도 남매를 또 만나니 얼마나 반가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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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테야 마을 역시 1090년도에 나바라 (주도)의 왕이 프랑스 순례자들을 위해 만들어준 마을이라고 한다. 제법 규모가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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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 (슈퍼마켓)를 구경하고 있던 프란체스코를 만나 맥주와 Rays 감자칩을 사들고 공원으로 향했다. 바바라는 어딘가를 구경하고 있다나. 주모 데 나랑하 (스페인어로 오렌지주스)를 발음하는데 이탈리아에 H발음이 없다길래 신기했다.


함께 걸을 때 수다스러운 너의 소리가 없으니 새소리만 가득했다고, 오늘 하루 너네들과 걷지 않아 조금 이상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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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잠시 시간을 보낸 뒤 프라는 바바라를 만나러 가고, 나는 숙소로 돌아왔다. 얼마 전 팜플로나에서 함께 저녁을 먹은 벨기에인 팀이 있길래 간단한 얘기를 주고받고 있는데 뒤에서 혼자 책을 읽던 아름다운 올리비아가 합류, 반가운 마틴까지 같은 숙소길래 잔뜩 수다를 떨다 밥을 먹으러 나왔다. (다이소를 알고 한국을 좋아했던 미국인 빈센트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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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어를 좀 하던 팀 덕분에 빵 위에 생선을 얹어먹는 특별한 경험도 하고, '라 리오하'라고 적힌 와인을 고르면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도 배웠다.


마틴과도 오랜만에 만났는데 같은 아시안이라 묘하게 의지가 되었고, 올리비아는 순례길을 체험하러 왔다며 곧 본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해가 지지 않는 저녁 9시까지 맛있는 와인 2병에 메뉴를 5개나 먹었는데도 인 당 15유로씩이 나왔다. 2년이 지난 지금처럼 와인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아마도 천국이었을 테다.


온전히 혼자 걸은 첫날, 정말 많은 걸 느꼈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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