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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균형 Oct 04. 2022

feat. 우리 모두는 섬이다.


    저는 가을을 참 좋아해요. 힘들게 땀 흘려 올라간 산 정상에서 쐬는 시원한 바람처럼, 말 그대로 땀 흘려 버텨낸 여름에 대한 보상이랄까요. 붉게 물들며 어여뻐지는 산, 시원한 바람, 높고 맑은 하늘, 쾌청한 공기, 말까지 살찌워진다는 이 모든 것이 좋아요. 그런데 동시에 저는 가을이 무서워요.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련만은 푸르름을 뽐내던 짙은 청록의 잎사귀가 붉게 물들며 떨어지는 순간이 내심 아파요. 실은 변하는 어떤 순간을 잘 견디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해요. 제 주변에 일어나는 일련의 상황들은 방어막이라도 치면서 잘 헤쳐나가는데, 변하는 계절 앞에서는 손이 묶인 채 어찌할 방책도 없이 꼼짝 못 하고 서 있을 수밖에 없더라고요. 가을은, 외로움을 느끼게 해 주는 계절 같아요.  


    고적한 가을을 목전에 두고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와 있어요. 통일전망대 바로 아래 작은 바다를 끼고 있는 시골마을이에요. 너도 나도 떠나는 한여름도 아니고, 형형색색 가을의 색을 뽐내는 시기도 아직은 아니어요. 어정쩡한 계절만큼이나 주말 사이 어중간한 요일에 떠나와서일까요. 해변을 따라 산책을 하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아요. 이 넓은 해변에 저와 아이들 뿐이네요.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 어딘가의 뜨거운 태양 아래 얕게 찰랑찰랑 오가는 파도 소리뿐이에요. 한적한 해변가에 앉아있노라니 마치 오가는 이 없는 섬 한가운데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함께 있던 3살 아가, J가 갑자기 조용해졌어요. 바다 앞에서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숙연해지는군요. 한 여름의 더위가 식은 계절에는 쉬이 뛰어들지 못하고 바다를 바라보게 되지요. 보다 보면 파도치는 소리가 들리고요. 파도소리를 듣다 보면 마음 한 켠이 선선해지지요.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시선을 빼앗겨요. 시선을 바다에 빼앗긴 사람의 뒷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요. 쉴 새 없이 조잘조잘 떠들며 웃는 이의 말이 없어지는 일순간, 그 찰나의 뒷모습 너머 쓸쓸함이 보이는 것도 같아요. 어린 J에게도 저만의 외로움이 있겠지요.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이 아이는 마음속에 어떤 섬을 키우고 있을까요.


    바닷가 어느 한 소도시에 살고 있는 아버지는 감성이 넘쳐흐르는 시인과 같은 사람이에요. 자주 만나지 못해도 저희는 만나면 이런저런 대화를 잘하는 부녀지간이에요. 어느 날 아버지가 '우리 모두는 섬이야.'라고 하시더라고요. 우리 각자가 하나의 섬으로 이루어졌다는 그의 말이 너무 쓸쓸했어요. '아빠랑 나는 부녀지간인데도? 우리도 따로 떨어져 있어? 왜?'라고 채근하는 딸을 보며 웃으셨어요. 각자의 섬을 등에 지고 살아간다고 하시면서요. 그가 건넨 '섬'이라는 단어에서 외로움이 엿보였지만, 어떤 위로의 말도 할 수 없었어요. 말없이 창 밖으로 보이는 바다 저 너머 작은 바위가 보이네요. 그의 섬도 저런 단단한 바위섬이려나요. 그런들 그의 외로움은 제가 어찌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에요. 제가 감히 그의 외로움을 달랠 수 없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이런 소소한 대화의 시간을 갖는 것, 그뿐이지요.


    아버지의 형제들이 그가 원치 않는 대화 주제를 꺼내어 화를 돋우신 적이 있어요. 주제는 다름 아닌 그의 아내, 나의 어머니여요. 아버지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셨겠지만, 실제로는 아니었지요. 형제지간이라 해도 서로를 온전히 알지 못한다는 생각을 처음 해 봤어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몇 해 전부터 따로 지내고 계셔요. 어머니는 서울에서 새로운 일을 하시다가 현재는 J와 B, 본인의 손주들을 돌보며 지내고 계셔요. 반면 아버지는 본인의 어머니를 돌보며 생활하고 계시고요. 아버지는 어머니가 집을 나온 이후로 단 한 번도 제게 그녀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어요. 묵언은 아버지만의 외로움을 처리하는 방법이었을 거예요. 저는 그저 아버지의 방식을 따라요. 그의 섬이 제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기만을 바라면서요. 침묵은 그가 섬을 가꾸는 방식인지도 모르죠.  


    그의 말마따나 저도 제 마음속에 섬 하나 품고 있겠지요. 누구에게 쉬이 내보이지 못하는 내가 서 있어요. 거기에는 외로움, 슬픔, 좌절 등의 감정이 숨 쉬는 늪지대도 있을 테고, 기쁨, 사랑, 희망이 널뛰는 초원도 있을 거예요. 저는 어릴 때 꽤나 심각한 (척하는) 아이였어요. 괜히 멍 때리고 생각 많은 척하고 혼자 온 세상의 사색을 즐기는 듯이 있는 아이, 그게 저였어요. 속으로 나의 외로움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며 툴툴거렸죠. 공감해주는 이 하나 없는 듯한 적막한 감정에 더 몸서리치곤 했던 것 같아요. 그 아이가 아직 거기 있으려나요. 지금은 다행히 섬 안에 가두고 있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때보다는 조금 쉽게 섬에 쌓인 먼지 바람결에 훌훌 털어버리죠.  


    우리 모두가 섬이라면, 그래서 가까이 갈 수 없다고 해도 이 섬에서 살랑 부는 바람결에 민들레 홀씨 날려 저 섬에 보낼게요. 그렇게 내 섬에도 어쩌다 바람결에 민들레 한 송이 피어오르면, 그걸로 된 거예요. 우리 모두가 홀로 떨어진 섬이라 해도, 우리에게는 하늘과 바다, 잔잔한 바람과 따사로운 햇살, 쉴 새 없이 찰박찰박 치는 파도가 곁에 있으니 괜찮을 거예요. 위기의 순간에 우리는 늘 자연으로 떠나곤 하잖아요. 어쩌면 산과 들과 바다와 같은 대자연을 통해서만 가슴 깊이 위로받고 벅찬 희열을 느낄 수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아, 파도 소리로 마음을 깨끗이 씻어내라고 우리는 섬인 걸까요. 섬에도 가을이 있겠죠. 고요한 가을의 따사로운 볕이 우리 모두의 섬에 닿기를 바라보아요. 그래서 누군가 섬 안에 꽁꽁 감춰두었던 곱게 물든 잎사귀 하나라도 보여주면 책 사이에 고이 펴 놓을게요. '이렇게 예쁜 잎사귀가 있었네.'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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