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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균형 Sep 27. 2022

feat. 나는 왜 화가 나는가


    첫째 J는 침대에서 뒤로 넘어지는 것을 좋아해요. 앉은 상태에서 뒤로 넘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가끔은 서 있는 상태에서 그대로 뒤로 넘어가요. 하지 말라고 얼러도 보고 혼내도 보았는데 씨익 웃고는 눈 마주치며 그대로 넘어가요. 어휴 모르겠다. 매번 뒤를 살피라고 주의를 주어도 제 눈에는 늘 아슬아슬해요. 뒤에 동생 B가 있거나 장난감이라도 있는지 늘 살피는 건 제 몫이지요.  


    이른 아침, 아직 저는 비몽사몽인데 J는 잠에서 깨었네요. 혼자 일어나서 심심한지 몸을 날리려는 낌새가 보이지만 모른 척하고 있었어요. 눈도 못 뜬 채 조심하라고만 겨우 소리 내어 얘기를 하기가 무섭게, 쿵. 제 허리로 묵직한 돌덩이가 툭 떨어지는 느낌이 들지 뭐예요. 와 이건 심상치 않네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어요. '엄마가, 뒤를 잘 살피라고 했지!!!' 정말로 화가 났어요. 무척이나 아프기도 했고요. 아이를 키우면서, 특히 남자아이들과 몸으로 놀아주다 보면 가볍게 다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하죠. 다리에 살짝 멍이 들기도 하고, 너무 흥분해서 재미있어하다 보면 깨무는 적도 있고요. 그때마다 감정 동요 없이 잘 타이르는데, 이번에는 정말로 화가 나더라고요. 이게 진짜, 야!  


    저는 왜 화가 났을까요. 아이가 처음 하는 행동도 아니었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치는 상황이 처음도 아니었고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제가 피곤한 상태였어요. 전날 오후에 커피를 마셔서 저녁에 잠이 오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늦게 잠이 들었고, 그 와중에 아이들이 새벽에 깨서 보채는 통에 잠을 깊게 자지 못한 상황이었는데, 아이는 밤잠을 푹 잤으니 에너지가 충만한 거죠. 아이는 평소처럼 재미거리를 찾아서 놀이를 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저의 상태에 따라 아이의 행동을 받아주지 못한 거예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오은영 박사님이 말씀하시는 일관성을 아이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내가 피곤한 상태를 만들면 안 되는구나. 와,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고요? 제가 겪어보니, 엄마는 극한 직업이에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아내도 극한 직업인 거. 저희 부부는 잘 싸우지 않는데 가끔 신랑에게 화가 날 때가 있지요. 화가 날 때 저는 화를 바로 표현하지 않아요. 우선 그 상황을 피해서 생각할 시간과 장소를 확보하지요. 흥분해 있을 때 화를 표현하면 서로 기분만 상하고 제가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더라고요. 그래서 우선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저를 살펴요. 나는 왜 화가 나지? 쟤가 진짜 잘못한 건가? 아니면 저이는 변함이 없는데, 내 심경에 변화가 생겼나? 내 심경의 변화는 왜 생겼지? 내가 이 상황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지? 이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어요. 그리고 다음날이 되어 충분한 체력이 보충되면 보통 없던 일이 되는데요. (이런 보살이 어딨어요. 그죠?) 아직 마음에 옹알이가 있다 싶으면 제가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언어와 장소와 시간을 찾아요. 그렇게 신랑에게 나의 상태를 전달하면 신랑도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제가 원하는 대로 해주더라고요. 사과를 한다던지, 행동을 개선한다던지, 등등의 방식으로요. 보세요. 극한직업 맞지요?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화가 난 상황이 기억나지 않아요. 일 년이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정황이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화가 나는 상황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그보다는 그로 인해 표출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더 필요한 과정이었어요. 그때 저는 100일이 안된 아가에게 밤낮으로 모유를 주느라 무척이나 피로했고, 신랑에게 매우 의존적이 되었던 것 같아요. 부부는 물론 한 배를 탔지만 각자의 독립성을 가지고 서로 인정해줘야 하는 건데, 말하지 않아도 신랑이 제 뜻대로 움직여주기를 기대했어요. 그러지 않은 모습에 화가 난 거죠. 나의 '화'를 곱씹다 보니 날것의 나를 마주하게 되더라고요. 평소에는 우아하게 숨기고 있는 내 안의 갈망, 서운함, 본성, 욕구와 같은 것들 말이에요. 이 나무껍질들을 어루만지다 보면 단단한 껍질 틈으로 튀어나온 뽀얀 속살을 만질 수 있어요. 그제야 비로소 드러나요. 내 상태가 어떤지, 나의 화가 표출되는 지점은 어디인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등과 같은 것들 말이에요. 이 중에서 버릴 수 있는 것은 버리고, 가장 얻고 싶은 것만 취해요. 모두 다 갖는 것은 욕심이에요. 이 과정을 거치면서 나무에 테 하나씩 그려가고 점점 두터워지고 있는 것 같아요. 내 안의 나무를 하나씩 채워가면서요.  


    어쩌면 누군가에게 화가 난다는 것은 아직 우리 사이에 애정이 남아있다는 반증일지도요. 그만큼의 기대가 있다는 거죠. 기대가 없으면 실망할 일도 없고 화가 날 일도 없죠. 지나가는 모든 사람에게 우리가 서운함을 느끼지 않잖아요. 아 제가 아직 제 화를 제대로 돋우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 그런다고요?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 이거 한 가지는 확실한 거 같아요. 제 화를 더 돋울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혹은 제 신랑이 흑화 되어 저의 화를 더 도드라지게 한다 해도) 더 깊숙이 숨어있는 저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한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면서 세월의 숭고한 흔적이 나이테에 새겨지는 거죠. 화가 나면 화를 인정해요. 화도 내고 사랑도 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거죠 뭐. 뭐가 되었든 모두 저 나름의 삶의 무늬를 만들어가고 있는 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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