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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도시에서도 단골 가게는 필요해

가가와현 다카마츠

by 두경아

솔직히 나는 게으른 편이다. 지금은 카메라를 들고 이곳저곳을 누비며 부지런히 살고 있지만, 실제 내 여행 스타일은 한 도시에서 오래 머무르면서 그 지역 주민처럼 ‘살다’ 오는 것이었다. 카메라 렌즈도 50mm 단렌즈 하나만 가지고. 뭐, 그 화각을 벗어나는 건 놓쳐도 좋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때마다 남들은 다 보고 오는 기본적인 관광지조차 돌아보지 못했지만, 골목에서 마주친 풍경이나 동네에서 만난 사람들, 유명하지 않은 식당에서 먹은 음식 등 소박한 이야깃거리가 도시 풍경과 함께 진하게 남았다. 하지만 여행 작가가 되고 난 뒤부터는 게으르고 방만한 여행은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취재가 아닌 휴가차 간 곳이라도, 어느 순간 유명한 장소나 맛집을 찾아 뛰듯이 걸으며 사진을 찍었다. 여러 개의 렌즈를 계속 바꿔가면서. 식당도 아무 데나 들어갈 수 없었다. 여러 루트를 통해 80% 이상의 맛집이어야 문지방을 넘었다.


그런 내 팽팽한 여행 감각을 릴랙스 시켜준 여행지가 있었다. 처음 가본 곳이지만 전혀 낯설지 않았던 다카마츠다. 다카마츠는 불편함이 없을 정도도 적당히 번화한 도시였다. 해안가에 있던 다카마츠역에서 시작된 시내 번화가는 기나긴 아케이드로 연결돼 있었는데, 그 획일화된 구조에서 어딘가 모를 안정감을 느꼈다. 당시 우리나라는 칼바람이 몰아쳐 발목까지 오는 롱패딩을 입어야 견딜 수 있었던 겨울이었는데, 다카마츠는 한 줌에 쥐어지는 경량 패딩 하나만 입어도 충분했다. 잔뜩 움츠러들던 근육이 기분과 함께 풀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가가와현은 우동현이라 불릴 정도로 다양한 우동을 만날 수 있다.


무뎌진 내 감각을 일깨운 건 우동이었다. 일본어판 가이드북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별책 부록인《다카마츠 우동 100선》이다. 새롭고 다양한 우동 메뉴를 보니 온몸의 세포가 깨어나듯 흥분이 됐다. 굳이 찾아 나서지 않아도 발 닿는 곳 어디든 우동 가게였으나, 여행 작가의 본능이 살아나 어느새 구글맵을 켜고 있었다. 그래서 고른 곳은 호텔에서 10분 정도 떨어져 있는 우동 가게였는데, 아케이드를 따라 걸으니 지루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애매한 시간이라 가게 문은 닫혀 있었다. 생각해 보니 아침부터 제대로 먹은 것이 없었고, 이미 당은 떨어질 대로 떨어져 눈앞이 아득해져 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저녁 오픈 시간까지 30분밖에 남지 않았으나 그마저 견디기 어려워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맞은편에 이자카야가 있었다. 원래 우동을 먹고 맥주를 마실 계획이었으나, 순간 ‘순서가 틀어지면 어때. 맥주부터 마시자’는 생각이 들어 앞뒤 재지 않고, 맛집이냐 아니냐도 따지지도 않고 이자카야에 발을 들였다.



주방을 중심으로 길게 바 테이블만 있는 작은 이자카야였다. 부부가 운영하는 가게였는데, 가게 구조상 주인과 얼굴을 마주 봐야 했고,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맥주와 꼬치를 시켰다. 배고파서였을까. 생맥주는 거짓말 조금 보태서 태어나서 마신 맥주 중 가장 맛있었다. 우동 가게가 문을 열 때까지만 딱 30분만 앉아 있자고 했는데, 술이 약하고 빈속이던 나는 이미 맥주 한 잔으로 거나하게 취해 기분이 좋아졌다.

그 기분으로 “포스터 속 기타리스트가 아저씨예요?” 등 주인과 시답잖은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눴다.

다카마츠에 머무는 동안 이름 모를 이자카야를 몇 번이나 더 방문했다. 늘 가려던 곳과는 떨어져 있어도 우동 후에는 맥주 맛이 그리워 다시 찾아갔다. 다시 찾아가니 주인이 얼굴을 알아보고 반겨준다. 그 맛에 또 갔다. 여행작가로 살아오면서 새로운 곳을 발굴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다시 또 없을 일이다. 어쩌면 여행작가가 된 이후 잃어버린 교감이 아닐까 싶었다.


단골 가게가 생기니, 다카마츠에서 나는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었다.








* 가가와현 다카마츠에 대한 여행 정보는 <지금은, 일본 소도시 여행>에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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