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록 Apr 06. 2019

사의 찬미(2018) 사랑과 사랑

김수산과 윤수선

진한 감정이 배어 있다는 걸 멀리서부터

알려오는 작품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사의 찬미>이다. 장미희 주연의 영화로도 보았던 사의 찬미. 


2018년에 이종석과 신혜선의 연기로 모습을 드러낸 사의 찬미.

좋은 작품은 두고 두고 새로운 모습으로 시대를 잇는다. 

사의 찬미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작품이 생각난다. 김연수 작가의 작품이라 내게는 '당연히 보는 책'이었지만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어 버린 그 책에 배어 있는 싸한 정서를 한 번 더 떠올려 보았다. 화자의 이모가 젊은 시절 유부남인 영화 감독과 살림을 차렸던 이야기.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을 쓰는 동안, 나는 내가 쓰는 소설은 무조건 아름다워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잔인한 곳이든, 우리가 살아온 인생이 얼마나 끔찍하든 그런 건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보이지 않는 길을 걷고, 잡히지 않는 손을 잡을 수만 있다면.
                                                                                           - 김연수,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작가의 말 중

 어떠한 정서는 생소한 듯 흡사한 부분이 있었는데, 작가의 말을 보면 내가 느낀 이 연결감이 영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말 중 들리지 않는 목소리와 보이지 않는 길과 잡히지 않는 손은 아마도 사랑, 이 아닐까.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 작품과는 관계가 없지만 얼마 전에 단막극으로도 제작된 김금희 작가의 <너무 한낮의 연애>도 생각난다. 아마도 최근에 접한 작품들 중  유쾌하지는 않은 사랑 이야기를 생각하다보니 나온 것 같다. 

본격적으로 작품을 읽어보기 전의 개인적인 생각인데, 이종석 외에 김우진 역으로 제 격인 배우를 생각해내기가 어려웠다. 한국 젊은 남자 배우 중 경중의 변주를 주며 멜로의 결을 살릴 수 있는 배우가 몇이나 될까. 다만 이종석이 그 중 하나라는 점은 분명하다. 


영화와 드라마 각 각 임성민과 이종석이 분했다. 영화와의 차이를 들자면 두 배우 그 중 특히 김우진 역할이 아주 어려졌다. 중후한 멋은 없어졌지만 망국인의 비애 어린 청초함은 이 쪽에서 피어난 꽃이다. 

영화에서는 장미희 배우가 맡았던 윤심덕 역을 젊은 배우 신혜선이 맡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카카오톡 페이지에서도 한 동안 이야기가 많이 올라왔던 것처럼, 판단에 어려움이 있을 듯 하다. 장미희의 윤심덕을 지워낼만한 신혜선의 윤심덕은 아직이었다. 

이 시대의 의복이 하나같이 마음에 든다. 

사랑스러운 윤심덕. 좀 더 현대화된 윤심덕의 모습이다. 


오히려 이 작품을 통해 장미희가 어떤 배우인지, 얼마만큼의 힘을 가진 배우인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요즘 한국의 젊은 여배우들에게는 없는 것이, 그 시대의 여배우에게는 있다. 다만 그 때 시작하여 지금까지 활동을 하는 배우가 드물기 때문에 더욱 돋보이는 것일테다. 


어쩌면 이런 글을 쓰면서 길게 - 오래 - 일 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드는 이유는 장미희같은 배우를 떠올리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의 신곡을 살리겠다는 극작가 김우진과 

관비 유학생 윤심덕. 


그 나이, 그 재능이 모여서 빛을 내던 호시절의 둘. 

서로를 궁금해하고 시선이 모이다가 서서히 서로에게 스미고 만다. 

국수는 보통 아주 정감이 가는 음식인 동시에 아주 격없이 다정하게 나오는 것 같은데 

저렇게 예쁘게 나오다니. 

2018년에 재해석된 신혜선의 심덕은 당돌하고 직선적이다. 장미희의 심덕도 그러했지만 신혜선의 심덕은 약간은 어설퍼서 보는 이에게 앙증맞고 귀엽다는 느낌을 준다. 

심덕이 먼저 우진에게 눈이 간다. 

나란히 걷는 남녀.

사랑은 느끼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고초를 겪는 우진 

그리고 그가 나오기를 기나리는 심덕. 

나는 열렬히 자신의 운명에 대한 저주를 들었다.
이 악마의 포위 속에서 단 한번이라도 마음의 안일을 준 것은 그녀였다.
- 1921년 11월 26일 일기, <마음의 자취>에서 - 

이 당시의 패션을 워낙 좋아하는지라 의상에 매우 눈이 갔다. 

핑크색 망토도 그렇고 

화려한 스타일의 모자들도 그러 했다. 

중세 시대의 화려한 의복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이 작품에서 경성 시대의 의복을 풍부하게 볼 수 있었다. 

그 때, 

이어지지 못했던 이유. 

우진에게는 이미 가정이 있었다. 

영화에서는 어린 딸도 있었다. 


우진과 심덕, 그리고 우진의 처. 

영화보다 드라마에서 우진 처의 역할이 더욱 분명하게 두드러졌다.

어쩔 수 없는 벽을 알고 자연스레 멀어진 둘. 


하지만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잊지 않았다는 것.

서랍 속을 만지작거리다가 만나는 기억들. 


하지만 낡은 기억이 아닌, 이어짐이었다. 

서로의 현실도, 장벽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 저는 이 심장 속 회오리 바람으로써 
처음으로 아들이라는 울타리를 뛰어넘었습니다. 
- 1926년 6월 21일 수상록, <출가>에서 -

현실과의 타협을 시도해보았으나 

미어지는 가슴을 이제 어쩔 수가 없다. 

서로의 역할. 아들로서, 지아비로서.

지아비로서의 역할을 바라지 않을테니 아들로서의 역할은 잊지 말아달라는 부탁.

우진의 처, 그녀는 부부의 정을 느껴본 적도 없었으나 감정이 아닌 책임감으로 삶을 지탱하는 사람이었다. 

지치고 지친 둘. 

돌이키기에는, 조금 더 힘 내기에는 너무 지쳐버린 둘이었다. 

그리고 사의 찬미가 시작된다. 

그리고, 

배에 오른다. 

세속의 모든 것을 내려둔다. 

당신은 지금 살고 있소?
아니오, 그러나 死를 바라고 있소.참으로 살려고.
- 1926년 5월 4일, 시 <死와 生의 이론>에서

부분 부분 많은 부분이 가지쳐졌지만 영화와 드라마, 장르의 벽을 넘어 <사의 찬미>를 이을 수 있었다.


야학에서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었다. 

그 당시는 엄청나게 손가락질 받던 불륜이다는 것, 이기적인 선택이었다는 점. 


아직은, 이라고 표현해야할 지, 계속 모를 것이라 표현해야할 지. 

모르겠다. 모르겠는 부분을 '보여주기'의 방식으로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문학의 특성, 나아가 예술의 특성일 것이다. 


끝으로, 영화 <사의 찬미>를 추천한다. 좀 더 긴 호흡으로 더 감정적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볼 수 있을 것이다. 많은 부분이 제외되었지만 홍난파의 시선과 일본과 조선인의 대립 등 조금 더 넓고 깊게 작품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백일의 낭군님 06, 꽃 같은 엔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