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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록 Feb 26. 2019

살인마 잭의 집(2019)The egoistic art

라스 폰 트리에가 보내는 극한경험


 간단하고 속되게 다섯 글자로, 이 영화는 ‘싫은데 5점’이다. 이 글에 “이기적 예술”이라 이름 붙였지만 말이다. 이 영화에 대한 사전 지식은 오직 “0점 아니면 5점”이라는 평이 있다는 것뿐이었고, 영화가 시작하고 내레이션이 나오자마자 5점을 예감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행복하지 않았고, 유쾌하지 않았지만, 중간이 없다는 이 영화에 대한 평가에서 미적으로는 분명 5점으로의 방향성을 확인했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작품들은 일관적으로 아름다움을 다뤄왔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을 '꼭' 극적인 행위로 드러내야하는 것인지는 의문점으로 남는다. 가장 민감한 문제인 종교(안티 크라이스트)와 성에 관한 극적인 선택과 표현들(님포매니악)로 괴짜가 된 감독인 라스 폰트리에의 신작에서 멧 딜런이 연기한 살인마 잭은 완전히 차갑지도 않고 완전히 뜨겁지도 않다. 그 점이 그간 봐오던 사이코패스의 모습과는 살짝 다르다. 잭은 뒤틀린 예술적 지향점을 가진 인간이다. 일반적인 사이코패스와 같이 공감능력이 부족한데, 잭은 필요성을 인지하고 연습한다.    

   

옛 성당엔 신만이 볼 수 있는 예술품들이 숨겨져 있고 그 뒤엔 위대한 건축가가 있죠. 살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와 같은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살인을 예술로, 그러니까 자신을 예술가로 생각한다. 잭의 ‘예술을 빙자한 엽기 행위’와 가학 그리고 변론이 영화 내내 내레이션으로 깔린다. 작품 중, 신은 양과 범을 창조했고 그들은 각각 결백과 순백, 그리고 야만을 상징한다. 필연적으로 범이 양을 사냥하고 그를 통해 양은 이면의 세계 그리고 영생을 얻는다. 잭은 이 점에 착안하여 예술을 빗대었다. 예술을 다른 세계를 열어주고 그 곳으로 이동시키며 그 아름다움을 영속시킨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 해석을 자신의 살인 행위를 예술로 설명하는 데도 붙인다. 이상한 논리를 심각하고 진지한 눈으로 전달하는 사이 관객은 수많은 이질감과 뒤틀린 미의식에 대한 9할의 불쾌감과 1할의 묘한 수긍을 느끼게 된다. 그의 자아도취는 광기와 어우러져 말도 안 되지만 ‘교양 살인마’를 탄생시킨다.     

<5+1, 그리고 라스 폰 트리에 감독 영화에서의 여성>     


 이 영화는 5+ 1의 뚜렷한 구성을 취한다. 감독이 제작 과정에서 슬레이트를 치는 행위로 구분해가며 진행하듯 잭은 안내자인 버지와 동행하며 12년간의 살인 중 다섯 가지를 뽑아 구분해낸다.      


 너무나 익숙한 우마 서먼의 얼굴을 한 첫 번째 희생자. 아마 영화를 본 사람들로 하여금 잭의 입장에서 서술되는 흐름에 적응하게 만든 장치가 1번 희생자의 캐릭터였을 것이다. 종적이 드문 도로에서 자동차 고장으로 먼저 도움을 요청한 1번 희생자는 우리가 선호하지 않는 여성의 면모를 온 몸으로 발산한다. 예의라고는 없고 본인의 기분과 상황만이 중요할 뿐이다. (-> '기부니즘'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다루어보려 한다.) 그녀는 잭에게 


당신은 연쇄 살인마 같아요.


라는 표현을 하는데 초면인 사람에게 아주 무례하게 농을 건네면서도 정작 그 불쾌감은 보지 못하고 자신은 유머러스하고 당당하다. 그리고 쉬지 않고 부탁을 가장한 요구를 해대며 잭을 자극한다.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관객은 너무나 아슬아슬 하다. 그 아슬아슬함에 관객의 몰입이 시작된다.      


 잭의 차에 동승하게 된 첫 번째 그녀는 아무런 의심 없이 모르는 이의 차에 몸을 싣는다. 문 밖에 세워두고 오래도록 대치하던 두 번째 여성은 대치의 시간이 무색하게도 연금을 2배 더 받게 해주겠다는 말에 그를 집 안으로 들인다. 세 번째 여성은 자식이 눈앞에서 죽어감에도 물리적인 힘이 없었으며 네 번째 여성은 아쉽게도 몸매는 육감적이고 머리는 나쁜, 주로 남성적 시선에서 쾌락의 매개이지만 소통하기에는 멍청한 이미지로 그려졌다.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 속 대부분의 여성에 대한 시선이다. 이번에는 아주 노골적으로, 네 번째 희생자에게 읊조린다. “왜 남성은 가해자야? 어딜 가도 가해자지? 그런데 왜 여성은 항상 희생자로 여겨지지?” 역차별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여체의 가장 상징적인 신체부위인 가슴을 경찰차의 유리창에 그리고 나머지 한 쪽은 가죽지갑마냥 가공해서 항상 손에 쥐고 다니며 잭은 역차별의 현실에는 경종을 울리고 본인의 성적 만족과 우월감을 드러낸다. 여체의 일부를 전리품 정도로 여기는 잭이었다. 그의 시선에는 (그가 감독이든 잭이든) 짚고 넘어가야만 하는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다섯 번째 희생자를 보여주고 잭의 집이 드러난다. 그렇게 부수고 다시 올리기를 반복하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집은 그이 살인 행위의 결과물을 차곡차곡 엮어 올려 완성된다. ‘작고 좋은 집을 완성했군, 잭.’ 그리고는 인도자 버지를 따라 지옥으로 향한다.      


<풀 베는 천국>     


 그의 천국은 풀을 베고 있다. 처음 살인에 대한 감각에 눈을 뜬 것도 그 순결한 규칙성과 성실한 반복에 있었을 것이다. 풀을 베는 소리, 베면서 나는 삭삭거리는 소리와 베는 이의 들숨과 날숨이 살아있는 것 그 자체를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지옥으로 가는 길에 잠깐 본 그의 천국도 풀을 베고 있었다. 잭의 강박 없는 평안, 살인을 통해 벗어난 강박 없는 평안은 무언가를 베면서 내뿜는 살아있음의 성실한 표기로 확실해지는 것이었다. 

 

 마지막에 이르자 “참회할 생각은 없는 건가, 잭?”이라는 버지의 물음이 이어진다. 잭은 “후회는 안 합니다. 얼마를 가야 하든 상관없어요.”라는 답을 남긴다. 그리고 조용히 지옥의 맨 마지막 단계 바로 두 층 위의 공간에서 만족하지 않고 벽을 타고 가려는 선택을 하고 실행에 옮기다가 지옥의 가장 마지막 층으로 떨어지게 된다. ‘정말’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들의 선택과 그 과정을 직설적인 화법으로 던져주었다.       


 압권은 극이 모두 끝난 후였다. 밤 영화를 보았으니 막차를 타는 시간이 되었고 이 영화의 러닝 타임이 생각보다 길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버티는 시간도, 끝나고 감당해야하는 밤의 시간도 길었다. 일어나려하자 들려오는


Hit the road Jack and don't come back no more


잭에게 떠나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는 말라는 말을 그리 흥겹게 할 수가 없었다. 

레이 찰스의 <Hit the road Jack>이었다. 


극적으로 흰 화면의 그림자와 시끄러운 음악소리. 


<살인마 잭의 집>은 극한예술이었으며, 극적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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