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열의 음악 앨범, 2019
줄거리를 주욱 쓰거나, 어떤 장면의 의미를 탐색하는 것이 이 영화를 보는 데 어떠한 의미가 되어줄까.
이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은 '어떠한 기대감'을 가지고 영화표를 끊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우리는 어떤 영화를 접하고, 보고 싶어 져서 실제로 티켓까지 구매에 이르는 과정에서 항상 어떤 종류의 기대를 가지고 극장에 들어선다. 배우에 대한, 감독에 대한, 또는 어떤 사건에 대한 관심 혹은 그냥 그 흐름에 취하고 싶어서. 이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에게는 아마 로맨스의 흐름에 흠뻑, 그 분위에게 흠취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봤다. 내가 그랬어서 말이다.
* 스포일러는 곳곳에 있습니다.
정해인이 주는 그 청신하고 해사한 이미지와 김고은의 담백하고 현실에 잘 녹아든 이미지가 주는 편안함 속의 야릇한 매력, 그리고 두 매력적인 남녀의 케미를 흠씬 느끼고 싶었다.
때는 내가 태어나서 말 못 했을 무렵이었지만 사랑과 연인은 만고불변의 소재라 바디랭귀지와 비슷하다. 시간과 장소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
이 영화 대부분은 정해인 배우의 이미지로 소비된다. 그의 이미지 자체가 곧 영화다.
오월 (五月) - 피천득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 같이 보드랍다
스물 한 살 나이었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 같이 쓸쓸하지는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득료애정통고 (得了愛情痛苦)
- 얻었도다, 애정의 고통을
실료애정통고 (失了愛情痛苦)
- 버렸도다, 애정의 고통을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해사하다는 표현과 청신하다는 표현이 그의 이미지를 가장 잘 표현해주는 말이라 생각한다.
피천득 시인의 글 첫 문단, 15년 전쯤 봤던 이 글귀를 잊지 못했다.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그렇다면 정해인은 오월의 얼굴을 한 배우다.
*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서도 <봄밤>에서도 이 영화에서도 그는 밝고 맑은 모습만을 보이지는 않는다. <도깨비>에서 잠시 나온 태희 오빠 외에는 상처가 있거나 약간은 모난 캐릭터를 표현해왔다. 일부러 그런 캐릭터를 설정하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 이어서 재밌는 점은, 태희 오빠와 지은탁의 만남이라는 점. 배우들 역시 돌고 돌게 돼 있다.
김고은 배우,
그녀는 '무지'를 비롯한 요즘의 리빙 소품샵을 닮았다. 담백하고 깔끔한데 가격도 모습도 저렴하지 않다. 가격을 따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담백한 매력을 오래 곁에 두게 한다. 그래서 특징이 강한 남자 배우 (예를 들어 공유나 정해인)와의 케미가 좋다. 균형이 맞는다고 하면 적절할 것 같다. 상대 배우도 담백하면 너무 은은하거나 힘이 달릴 수 있다.
두 매력적인 배우가 만들어 내는 그림, 그것이 이 영화의 전부이자 관전 포인트이다. 아마도 첫사랑, 혹은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오래 남는 사랑을 더듬는 한 편의 트레일러 같았다.
* 개인적으로 가장 풋풋하고 사랑스러웠던 장면.
떨고 있는 모습을 어쩜 그리 잘 담았는지. 웃음이 쏟아졌지만 우스워서가 아니라 너무 귀여워서 사랑스러워서 그랬다. 그런 연기 또한 해내는 김고은이다. 바로 이 부분이 김고은의 대중적인 매력이다.
그리고 또 한 시절.
지금을 살아가는 20대면 거의 공감하지 않을까. 지금 내 모습이 너무 못나서 괴로워하고 조금은 구겨져 사는.
그리고 소위 말하는 안정의 궤도에 올라가는 미수.
그를 다시 만난다. 둘은 다시 사랑을 마주한다.
흠뻑 취해 사랑한다.
여기까지이다. 이 영화의 볼만한 아름다움.
현우의 상처와 그 되새김도 그리 눈에 띄게 그려지진 않았다. 다만 예쁜 인물들이 영화를 끌어간다.
중간에 약간 얄미울 수도 있는 인물도 등장하지만 그리 큰 타격도, 중요한 의미와도 조금 거리가 멀다. 서사는 엉성하고 반딧불이 불빛 저 멀리 점멸하듯 미약하지만 눈을 끄는 한 점을 좇아 영화는 간다.
우연에만 기대고 개연성은 부족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첫사랑.
순서적으로 처음인 사랑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인생 첫 울림이자 큰 울림. 첫사랑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때로는 이미지만으로 남는 것이 첫사랑이다.
첫사랑의 모습을 이렇게 예쁘고 깨끗하게 남겨주었다. 우리는 첫사랑에서 개연성과 합리성을 따지고 찾지 않는다. 처연함에 얼룩지고 서글퍼서 아파도 결국에는 어떤 이미지로 평생을 가는 것이 첫사랑, 그 게 아니어도 마음에 남는 사랑이다.
이 포즈가 너무 좋다. 다음에 사진 찍는다면 이렇게 찍고 싶다. 행복이 흐드러진 게 보인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 마음속에 있던 일들이 쏟아져서 꽤나 울어버렸다.
뛰지 마 현우야... 제발 뛰지 마, 다쳐...
미워서 싫어서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마음에 담은 채 멀어지려는 그 순간. 그 순간까지도 상대방이 애처롭고 아련한 마음. 감정이 잘 담긴 장면이다.
* 너무나 좋아하는 곳이고, 그 길을 함께 하는 사람과 보는 기분이 또 색달랐다.
** 이 장면에서 김고은 배우의 매력이라는 것이 터져 버렸다.
* 사랑에 있어 타이밍은 시작이자, 끝이다. 거의 모든 것이다. 그리고 그 타이밍을 만들고 또 잡는 것이 사랑에 있어 대단한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 개연성도 서사도 없다고 혹평을 하기에는, 나는 현우의 첫 등장에서 왜 동네 슈퍼를 두고 제과점에 와서 엄한 얼굴로 두부를 찾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두 인물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지.
*** 영화로서의 평가는 낮지만, 이미지로서의 평가는 높이 하고 싶다.
19.08.28 수요일, 개봉일에 홍대 cgv에서.
<유열의 음악앨범>,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