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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록 Dec 07. 2020

#2 크레바스, 그 틈에 갇혀 소리 지르는 여자

KBS 드라마 스페셜 2020

KBS 드라마 스페셜 2020 두 번째 작품, 크레바스.


이 극은 오후 4시의 가을 색과 새벽 네 시의 검푸름을 띠고 있다. 

주홍빛 세상, 그리고 검푸른 밤.

이 단막극에는 극을 끌어가는 '어두운 힘'이 있다. 


수민(윤세아) 부부관계는 서걱거리고 무미건조하다. 

아들은 외국으로 유학에 가 있고, 수민은 아이가 보고 싶지만 아이는 엄마 마음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유학생활의 활기에만, 파리 여행에만 눈을 반짝인다. 


잠시만이라도 방학 중 아이의 귀국만을 기다리던 그녀에게 상의 없이 아들의 추가 연수를 잡은 남편에게 따지지만 이 가족은 서로 기대고 그리워하지 않는다. 남편에게는 정이 없고, 사랑하는 아들은 엄마에게는 관심도 없다. 


그렇게 수민은 혼자가 된다. 아무도 수민을 기다리지 않고 아무도 수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상현(지승현)의 집에는 젖과 꿀이 필요하고, 땀과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 


수민과 상현은 직장에서 만난 친구 사이였고 친구보다는 가깝고 연인보다는 먼 그 사이였던 것 같다. 그 사이를 파고든 진우(김형묵)가 수민에게 관심을 보이자 적극 그 관계를 밀어주었고, 결혼에 이르게 된다.

하루아침에 형수님 되고 제수씨 되고! 그래 봤자 지들도 일 년에 몇 번 만나지도 않으면서.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외침이었다. 

이 극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유심히 보았는데 이 장면에서 명확하게 밝혀졌다. 


한국 사회에서 호칭의 기반이 되는 관계는 지극히 남성 중심적이다. 남성 간의 서열에 의해 여성과의 기존 관계, 여성의 나이, 지위 등과 관계없이 호칭과 관계가 결정된다. 

그렇게 '수민아'라고 부르던 친구는 깍듯이 '형수님'이 된다.


이것을 이렇게 정면으로 이야기한 작품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최근 웹툰에서 웹드라마 형식으로 방영되고 있는  <며느라기>에서도 의문을 품 듯, 많이들 어색해하는 관계이며 호칭이다. 


언어 표현으로 대변되는, 지극히 남성 중심적인 사회의 관계들을 들춰졌다. 

그리고 

 균열, 작은 균열


왜 네가 혼자야, 내가 있잖아. 



수민은 본인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찾는다.

내 마음, 내 손길, 내 몸 진짜로 원하고 갈구하는 사람이야. 내가 없으면, 나마저 없으면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구. 당신은 아니잖아, 당신한테 나 없는 사람이잖아. 이제 와서 왜 그래, 살던 대로 살아. 이제 와서 왜 그래?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냐?


나 있어서 좋다며, 나 때문에 안 외롭다며!


없어도 돼, 없어도 된다고!! 너 없이도 잘 살 거야.


필요에 의해 존재감을 찾다. 그러다 의존하게 된다. 


<응답하라, 1988>의 한 에피소드 중 라미란의 에피소드가 있었다. 
엄마가 집을 비운 사이, 아무도 서운해하지 않고, 빈자리 또는 난 자리가 표 나지 않는 것을 보고 엄마 라미란은 본인의 존재 가치를 잃었다고 생각하고 우울에 빠진다. 

그 우울감을 해결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빈자리를 절실히 느끼는 가족들의 모습이었다. 둘째 아들로부터 시작된 '모자람 코스프레'가 엄마를 구했다. 


수민은 누군가 자신을 필요로 할 때, 자존감을 느끼고 자아 유능감, 효능감을 느낀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의 단단한 기반 없이, 타인의 필요만으로 쌓아 올려진 자존감은 '사상누각'이다.


살아있는 게 더 끔찍하대, 저기 빠지면 말이야. 
온몸이 으스러져서 살아 남아도 올라갈 수 없대. 
저런 거 알면서 왜 가냐, 집에나 있지. 
(집에) 들어가 봐야 되는 거 아냐? 
괜찮아. 


크레바스, 억겁의 시간이 만든, 함정이다.


수민은, 아니 우리 주변의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지금 크레바스에 빠져있을 수 있다. 

아무리 소리 질러도 듣지, 못 하고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럼에도 (중의적 표현일 수 있겠다.) 그 속으로 들어간다. 


누군가가 빠져있을 곳에 대한 처절한 절규를 감각적으로 그려낸 작품이었다. 배우 윤세아씨는 스카이캐슬에서의 모습과 같이 자기 옷을 딱 입은 듯 역할을 소화해주었다. 이제 그녀의 다른 모습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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