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드라마스페셜 2020
언젠가 내가 다니던 학원이 있던 대방역부터 걸어서 노량진역에 도착해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어린애들이 여기 오래 있으면 안 되겠다."
성년의 나이 중 가장 젊은 나날이 뿜어내는 그 생동하는 빛이 사그라들 것 같아서였다. 나는 이제 이십대가 아니지만 그래서 알 수 있는 것 하나는 스물이 갓 넘은 사람들 중 무언가 해보겠다는 생각이 있는 사람에게 오는 빛이 진짜 있다는 거다. 물론 어떤 이유로든 그게 없는 사람도 있고 꽤 오랫동안 지지 않고 빛나는 사람도 있다.
내 주위에도 시험 준비라는 터널을 지나온 친구들이 있다. 실패 후 마음 접고 나온 이도, 지지부진한 몇 해 끝에 결국에는 합격을 한 이도, 시작하고 금방 빠져나온 이도 있다. 아직 그 터널 안을 빠져나오지 않은 이도 있다.
이번에 리뷰할 KBS 드라마스페셜 <원나잇>은 아직 터널 안에 있는 이들의 얼굴을 비춘다.
주인공은 경찰 준비생, 여자 친구는 임용준비생, 그리고 어쩌다 얽힌 또 다른 주인공은 공무원 9급 준비생이다.
00 준비생
너무나 익숙하다.
심지어 남자 친구의 친구의 남자 친구라는 사람을 칭할 때 '삼성 준비생'이라 말하는 것도 실제로 듣고 어안이 벙벙했던 기억이 있다.
뭐 하는 분이시냐는 질문에 "아 우리 오빠는 삼성 준비해~"라 했다는 걸 듣는데 명치끝이 딱딱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다못해 이제 기업의 이름이 신분 상태를 나타내는 말에 등장하다니. '어떤' 꿈이 중요하지 않고 '어느' 회사인지, 간판만이 중요해진 것 같다. 준비생 단어에 수식어가 기업이든 경찰이든 무엇이든, 무엇이 되지 않으면 무엇이 되겠다고 박아놓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다.
한 명은 몇 해 째 '남 일'에 관여하다 경찰시험에서 근소한 차로 떨어지고 여자 한 명은 기간제 교사로 임용 준비하다 떨어지고 집안의 생계까지 책임지다 나가떨어질 판이고 또 나오는 한 명은 알고 보니 동갑에 시험 준비하다가 어머니의 병환으로 어두운 세계의 끄나풀이 된다.
그렇게 모두 사연이 있는 동갑내기 청춘들인데 그들의 시련 중 자신에 기인한 것은 그다지 없어 보인다. 뜻하지 않게 생긴 고통과 좌절에 담가진 와중에 뜻하지 않던 큰돈이 사건의 불씨가 되어 작은 속 안에 감춰뒀던 불안들이 삐져나와 서로를 마주한다.
단막극의 가장 큰 역할은 신인 배우의 발굴과 이미 데뷔한 배우의 재발견이다.
한 해의 굵직한 드라마 라인업은 내가 바라는 대로 될 리 정말 가능성 낮지만, 단막극은 가능하다. 아들친구 엄마로 이 드라마에도 나오고 저 드라마에도 나오는 배우가 어떤 날은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나오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항상 조금만 더 떴으면 좋겠다 생각하는 배우의 얼굴을 여기서 보기도 한다. 조조연 정도로만 나오던 배우의 호흡 긴 연기를 보고 싶을 때도 그 마음을 충족해줄 때가 많다.
해가 거의 끝나갈 무렵 보는 단막극이 내게 주는 즐거움이 크다.
이번에는 김성철 배우가 얼굴을 보여주었다.
'한예종 10학번 친구들'로 이미 많은 관심을 끌었던 배우들 중 하나이다. 가장 최근에는 <그 해, 우리는>이라는 SBS 드라마에서 주인공 최우식(최웅)의 친한 친구로 등장하고 있고, 2021년 한 해 <빈센조>와 <스위트홈>에서도 좋은 연기를 보여 주었다.
이 배우가 가진 장점은 묘하다.
전에 <To jenny>라는 단막극에서 봤을 때의 그 순수한 사랑엔 어수룩한 와중에 음악적 흥이 있는 학생에서 <원나잇>에서 생각은 있고 미래는 안 보이는 노량진의 스물아홉을 거쳐 이 멍한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그해 우리는>에서 상처 있는 아이가 그대로 자란 어른의 얼굴을 연기하며 날카롭고 외로움을 담아낸다. 물론 중간에 <스위트홈>에서 '미친 얼굴'을 하기도 했다.
놀라운 것은 그 어느 모습도 어색함이 없다는 것. 입체적인 얼굴도 로맨스물의 주인공(전통적으로 이동욱)형 얼굴도 아닌데 어떤 때는 풋풋한, 어떤 때는 쓸쓸한 사랑을 담고 또 어떤 날에는 청춘의 막막함을 담는다.
그가 보여줄 다른 얼굴 혹은 좀 더 잘 벼려진 칼 같은 모습을 기대해본다.